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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있는 곳의 풍경
루디린23. 03. 19 · 읽음 279

  여행을 떠나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익숙하게 겪어왔던 것들이 실제로는 당연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테다. 여기에는 문화, 관습, 규범 여러 가지가 포함되겠지만 우리가 흔히 바라보는 자연풍경, 그리고 꽃과 나무들도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해외로 여행을 가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이국적'이고 '낯선' 풍광을 즐기기 위해 떠나는 편이다. 아무래도 이런 목적을 더 쉽게 충족시키는 여행지는 우리 나라와 다른 문화적, 자연적 배경을 가진 나라일텐데 나에게는 '낯선 일탈'이지만 그곳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이 되기도 한다. 

 

  영국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이동했던 적이 있다. 겨울이었고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날이 흐리고 비바람이 불었었다. 교외에서 도심으로 이동하다보니 들판을 많이 지났는데 날씨 때문인지 을씨년스러웠다. 버스에서 창밖을 보며 소설 '해리포터'를 떠올렸다. 당장 소설 속 '죽음을 먹는 자들'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녀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런 풍광이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에게 소설 '해리포터'는 신비하고 낯선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지만 영국 사람들에게는 기숙사 생활이라든가 그들에게 익숙한 문화와 풍광이 가미된 이야기이다.

 

  때때로 작품 속에서 만나는 '낯섦'과 '독특함'이 창작자에게는 '익숙함'과 '일상'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 또 다른 놀라움을 얻게 된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삼나무를 많이 그렸다. 삼나무가 있는 그의 그림들을 좋아하는데 그의 독특한 붓터치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비단 삼나무가 등장하는 그림이 아니더라도 그의 붓끝에서 펼쳐지는 풍경들은 마치 생명력이 꿈틀거리듯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어떻길래 이런 그림들을 그려낸 것일까 궁금해진다. 

 

고흐 - 삼나무가 있는 밀밭

 

  그리고 실제 그가 봤을 유럽의 삼나무 숲과 밀밭들을 보면서 그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항상 바라보던 일상의 풍경을 그려냈음을 깨달았다. 그에게 익숙했던 풍경이 나에게는 낯선 풍경이었기에 더 큰 인상으로 다가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도 처음에는 잘못 이해한 작품이었다. 얼핏 보고 매화나무 내지는 벚꽃나무인가 싶었다. 유럽에도 매화와 벚꽃이 피었던 걸까, 피어있지 않다면 고흐가 일본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어 그 영향을 받아 그린 그림일까 생각했었다. 실상은 아몬드꽃을 그린 그림으로  당시 태어난 조카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고흐가 지내고 있던 프랑스 남부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아몬드 나무 꽃들을 그린 것이라 한다. (일본의 목판화에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화풍에 한정한다.)

 

고흐 - 꽃 피는 아몬드 나무

 

  고흐의 아몬드 나무 그림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스라엘에 여행가서 만발한 아몬드 꽃들을 마주했을 때였다. 마치 우리의 매화, 벚꽃의 자리를 지중해권 나라나 미국 캘리포니아 등지에서는 아몬드꽃이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매화나무, 벚나무, 아몬드나무 모두 친적뻘이라 닮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언덕 곳곳을 가득 채운 흰색의 꽃들은 아름답게 기억에 남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아몬드꽃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매화와 벚꽃 피는 계절이 다가오니 그때의 아몬드꽃들이 떠오른다. 여기서는 볼 수 없는 꽃이라 그리움이 더 깊어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봄이 되면 매화와 벚꽃을 떠올리고 지구 반대편 누군가는 아몬드꽃을 떠올릴 것이다. 비단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내가 서있는 곳의 풍경들이 나를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흔히 지나칠 수 있는 매일 마주하는 작은 풀과 꽃들과 나무들이 나의 시간을 채우고 내 삶을 엮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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