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아닌 남편이 그랬었다. 어제를 기준으로 내일 비가 올 예정이니 오늘이 배추묘목을 옮겨 심기 딱 좋은 날이라고. 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한말을 망각한 채, 나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오늘 저녁먹고 들어가도 되겠냐고. 당연히 되지! 저녁만 먹고 온다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저녁이 아닌 술을 마시고 들어올것을. 그래서 당당하게 권리 요구를 했다. 오늘 텃밭에 가기로 하지 않았냐고. 선약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깨는건 나에 대한 신의를 져버리는 것이라고. 나의 기세에 눌린 남편은 자신이 한 말도 있어서 그런지 깨갱하고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남편이 귀가 후 환복하는 동안 나는 베란다로 향했다. 진하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채 삽을 들고 배추 1호, 배추 2호, 배추 3호와 더불어 배추 1호 옆에서 꼬봉(?)처럼 붙어있던 녀석도 같이 퍼냈다. 재활용 스치로폼에서 자란 아이들은 재활용 찜닭용기에 옮겨져 새로운 터전에 뿌리내릴 준비를 했다.
이전에 미리 준비한 모종삽세트와 남편이 발빠르게 관리사무소에서 받아온 비료를 가지고 위풍당당하게 우리는 텃밭으로 향했다. 가끔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조금은 무심했던 텃밭은 여전히 상태가 안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전에 심어놓았던 상추묘목은 큰 성장을 하지 못했고, 되레 비가 자주 오는 바람에 아들이 마구 흩뿌려놓은 상추씨앗이 다 발아를 해 일렬로 싹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한숨이 나는 모양새지만 어쩌겠나, 못난 모습이어도 있는 그대로 임시 주인이지만 여튼 주인인 내가 사랑해줘야지.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잡초제거를 하고 나섰다. 잡초인지 아닌지 정체를 모를 풀들이 많아서 자꾸 나한테 물어보는데, 나도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그냥 잡초같으면 다 뽑아버리라고 했다. 그렇게 한쪽에서는 잡초제거, 한쪽에서는 묘목심기가 시작되었다.
역시 적극적인 우리 딸. 배추 3호를 심고 아쉬웠는지 아직은 묘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녀석이지만 같이 따라나온 녀석을 잡고 혼자 심어보겠다고 애를 쓰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기특했다. 우리집에서 나의 취미를 유일하게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엄마바라기 우리 딸. 엄마가 베란다만큼은 욕심을 부려서 만날 물도 주고 싶다고 하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데 못해보게해서 그동안 엄청 미안했는데, 텃밭으로 어느정도 해소된것같아 뿌듯한 마음도 함께 들었다. 반면 깔끔쟁이 우리아들은 역시나 주춤주춤했지만 그래도 저번보다는 적극적으로 나서 손으로 직접 흙도 토닥여주는 모습을 보였다. 도심 한가운데 살지만 이렇게라도 자연을 접하게 해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한 10분정도의 시간 동안 우리 남편의 부단한 잡초제거와 우리 딸의 애씀과 나의 용씀이 합쳐져 우리 배추 1-3호의 이사가 무사히 완료되었다.
스티로폼에 있을 때는 존재감이 엄청나게 컸던 녀석들이 텃밭으로 오니 어찌나 귀여운지 보고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묘목을 옮겨심으며 느낀건, 요새 그래도 봄비가 자주내려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텃밭은 부지가 넓고 바깥에 있는 만큼 햇볕도 장애물없이 바로 받아서 땅이 쉽게 메마른다는 사실이었다. 배추가 물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스티로폼에서 키울 때 항상 흙을 촉촉한 상태로 유지시키려고 물주기에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묘목 뿌리에 있는 흙과 텃밭 흙을 비교해보니 촉촉함이 진짜 천지차이였다. 스티로폼 출신 흙이 물광피부라면 텃밭흙은 완전 악건성피부랄까.
그래서 이 참에 물도 흠뻑 주고 가기로 했다. 마침 시간도 해가 지고 있는 6-7시 사이였기에 당장 물주기에 돌입!
혹여나 몰라서 너무 묘목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물을 주지 말랬더니 묘목 사이에 집중적으로 물을 주는 우리 아들. 여기저기 골고루 주라고 말 안하면 저기 물웅덩이 생길뻔 했다.(ㅋㅋ)
심을때도 뚝심있게 심더니 애정이 남다른지 배추 4호(원래 이름이 없던 곁가지 신세였지만 우리딸의 사랑으로 배추 4호로 급격히 승격한 아기묘목)에게 열심히 물을 주는 딸. 배추 4호가 딸의 사랑을 받아 쑥쑥 자랐으면 한다. 물까지 주고 비료도 뿌리고 모든것이 마무리 되었다. 여전히 땅은 투박하고 엉망인 상태이지만 그나마 남편의 손길을 받아 조금 정리되었고, 상추와 배추 묘목, 그리고 상추와 당근 새싹들로 생명이 가득해졌다. 그리고 오늘 진짜 봄비가 내리고 있다. 베란다에서 항상 하루정도 받아둔 수돗물을 먹고 자란 녀석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날것의 빗물과, 날것의 땅과, 날것의 바람은 어떠했을까. 퇴근하고 녀석들이 안부를 물으러 가야겠다.
PS.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주민을 만나 텃밭얘기를 하는데 배추를 심었다고 하니 "지금 배추를 심었다고!?"라고 하셨다. 그래서 찾아보니 지금은 배추 파종을 하는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더 검색해보니 옛날과는 다르게 요새는 봄배추, 여름배추, 가을배추 등등 방법이 다 달라서 꼭 가을이나 늦여름에만 파종하는것은 아니더라. 어쩐지 스티로폼에 심은게 3월이었나, 초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쑥쑥 잘컸으니, 시기가 조금 어긋났다 하더라도 텃밭에서 잘 자라주길 소망한다.
파초청녀
커피를 사랑하고, 환경지키는것에 관심이 많으며,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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