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랬다. 아무리 텃밭에 물을 주어도 비한번 내리는게 땅에 흡수도 잘 되고 식물들에게 더 큰 영양가가 된다고. 자연의 힘은 인간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영역이라고. 그래서였을까. 연휴내내 비가 와서 아이들과 멋드러진 여행지에 가지 못했음에도 이상하게 마음 한편은 한없이 편안했다. 우리 텃밭에 심은 생명체들이 아주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비가 한차례 내린 다음 날, 약간은 기대되는 마음으로 짬을 내어 밭에 가보았다. 역시나 빗물을 흠뻑 머금은 녀석들은 말 그대로 파릇파릇한 모습을 맘껏 뽐내고 있었다. 햇빛이 짱짱할 때면 유독 눈에 띄게 시들어있는 가지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허리를 반듯하게 피고 있었고, 상추는 더 쑥쑥 커서 이제는 잎이 내 손바닥만해져서 수확이 멀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변화를 다 제치고 나의 눈을 사로잡은 녀석이 있었으니, 바로 "꽃"이었다. 내가 화초를 심은것도 아닌데 왠 꽃이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게 인지상정! (갑분 포켓몬 버전..벗어날 수 없는 육아맘의 본능....ㅠㅠ)여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생명체에서 꽃이 피었다. 말 그대로 비가 피워낸 꽃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사진투척!
짠! 이 아이는 바로 "고추"묘종에서 피어난 꽃이다.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고추묘종은 내 의지로 심은게 아니기때문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렇게 어여쁜 하얀 꽃 한송이가 피고나서부터는 나의 관심 우선순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고추꽃이 이렇게 예쁜지도 몰랐을 뿐더러 꽃이 피었다는건 곧 열매가 열릴 수도 있다는 신호였기에 너무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겨우 한송이인데, 그 한송이가 나의 마음을 확 사로잡은 것이다. 그래서 한장 더 찍었다.
이번엔 아래에서. 무슨 각도가 이러냐, 싶겠지만 이것도 겨우 건진거다. 아직 묘종의 키가 크지 않았기에 어떻게든 찍어보려고 몸을 낮추고 낮추었지만 이정도가 최선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너무 신기하고 기뻤던 이 날. 그리고 그 다음날 비를 한차례 더 맞은 꽃은 아주 절정에 이르렀다.
한송이 피었으니 이제 줄줄이 피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너무도 허망하게 스러졌지만, 요 녀석의 이 아름다운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 꽃을 좋아했던 사람이던가. 나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자연의 생명력에 반해버린 사람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추 꽃 한송이 옆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또 다른 봉우리가 필 준비를 마쳤다. 사실 묘종의 모습이 다 비슷비슷해서 처음에는 헛갈렸지만 바로 구분할 수 있었다. 왜냐면 이미 절정에 다다랐던 나의 고추꽃 1호는 이제 시들어가고 있었고, 2호는 봉우리를 터뜨리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묘종은 첫번째 묘종보다 더 많은 꽃을 피울것만 같다. 여러개의 봉우리들이 이미 살이 통통이 오른 모습이다. 친정엄마가 고추는 열매가 잘 열린다더니 벌써부터 기대만발이다. 청양고추가 아니라 아삭이 고추라서 열리는 족족 이곳저곳 많이 나눠주기도 하고 나도 많이 먹을 예정. (텃밭주인은 또 이렇게 저번에 이어 김칫국을 계속 들이 붓는중...ㅋㅋ)
고추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또 다른 예상외의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은 내가 분명 심었지만 그 존재가 너무 미미해 아예 잊어버리고 있던 녀석. 바로 감자이다. 그렇게 열심히 물을 주어도 자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던 녀석들이 이틀 내내 아주 줄기차게 내리던 비를 맞더니 드디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가장 예쁜 원형의 모양으로 자란 감자 1호의 잎사귀들. 아직 묘종에 눈이 밝지 못한 나는 처음에 이게 깻잎인지 감자인지 구분이 안되어서 결국 스마트렌즈로 찍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주 정확하게 "감자"라고 나와서 그제야 감자라는걸 인지했다. 그나마 이 녀석은 모양이 딱 감자잎이라서 순탄하게 넘어갔는데..2호는 정말 난감했다. 스마트렌즈에서 무슨 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감자인데, 스마트한 스마트폰이 꽃이라니..이런 난감한 상황. 하지만 곧 해결되었다. 먼저 감자를 심으신 친정엄마가 감자라고 진단(?)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뽑혀나갈뻔한 감자 2호.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자 3호. 조만간 예쁜 원형의 모습이 될, 아직은 과도기인 녀석.
감자 싹이 쑥 큰모습을 보고 감자도 이제 희망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늘 나의 구세주 같았던 친정엄마가 갑자기 직격탄을 날리셨다. 너네 텃밭 땅은 너무 안좋아서 감자가 안열릴것 같다고. 그래도 꽃은 피울 수 있을테니 일단 내버려 두라고. 감자꽃이 참 이쁘다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곧 잔잔해졌다. 수확을 못해도 꽃이라도 피운다면 그 또한 신비할 것이고 소중한 경험일테니.
이렇게 하루하루 텃밭은 여물어 가고 있다. 여전히 안좋은 텃밭의 모습에 적응중이고, 비가와서 그런지 이제 종종 보이는 무당벌레를 비롯한 개미와 정체모를 벌레들 때문에 한번씩 식겁을 하긴 하지만 조금씩 이 모든 과정을 받아들이려 초보텃밭주인은 노력하고 있다. 다음에는 첫 상추수확기를 기록해보려 한다.
파초청녀
커피를 사랑하고, 환경지키는것에 관심이 많으며,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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