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래퍼다
지담23. 05. 20 · 읽음 47

"아무 생각 없었는데, 아빠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잖아?" 라며 웃어준다. 친구 만나러 나가는 일팔 청춘 따님이 신발을 신으면서 외쳤다. 이게 정신적 작용을 주고받는 사이. 그런 사이가 많을수록 행복해지는 인생. 우리 서로 들고 날 때 꼭 서로 안부를 묻자. 챙겨주자.

 


남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엄마, 아빠는 래퍼라고. 너희들이 좋아하는 그 노래, 랩을 하는 래퍼라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진심을 마음에 담아 주절주절 거리는 래퍼라고. 했던 가사 또 내뱉고, 또 내뱉는 래퍼라고. 그 말들을 랩가사처럼 흘려들으라고. 그러다 한 단어, 한 마디가 귀에 와, 가슴에 와 콕 박히는 게 있을 거라고. 자꾸 듣다 보면 그럴 거라고. 

 

대부분의 10대들이 랩을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가사가 솔직하기 때문이다. 숨김이 없다. 욕하고 싶을 때 욕을 내뱉는다. 소리 지르고 싶을 때 지른다. 자기 대신 자신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랩이 그렇다. 흘려듣다가 한 두 단어가 귀에 꽂힌다. 먼저 나 일찍 살아온 세대의 조언이 그렇다. 다 필요한 이야기다. 맞은 말이다. 그래서 더 싫어진다. 엄마말이 다 맞아서 더 싫어진다. 

 

학교에서 만나는 남의 자식들한테도 똑같이 부탁한다. 나는 래퍼라고.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건 옳지 않은 거라고. 그냥 랩으로 들으라고. 그리고 흘리라고. 그러다 흘려듣던 그 멘트에서 한 두 말이 가슴에 와닿으면 크는 거라고.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 언제더라도.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거라고. 서서히 랩 가사가 자기 이야기가 되는 거라고. 래퍼가 랩을 읇조릴 때 관객의 태도가 중요한 거라고. 

 


관객의 태도를 잘 배우다 보면 전혀 다르게 들릴 때가 있을 거라고. 10대 때는 온 세상이 자기를 알아봐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일 거라고.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세상천지 널린 것처럼 보일 거라고. 하지만 더 살다 보면, 그러면 지금이 그래도 자기를 알아봐 주고, 할 수 있는 게 더 많았던 때였던 것을 알게 될 거라고. 그걸 조금 더 알기 때문에 보고도 못 본 척하지 못하는 건, 잘못된 걸 알려주려는 건, 더 나은 길을 보여주려는 건 그저 어른들의 의무 같은 거라는 걸 그렇게 서서히 알아 갈 거라고. 너희들도 조만간 어린 누군가에게 자기 스타일대로의 래퍼가 되어 갈 거라고. 고등학생은 벌써 중학생, 초등학생한테는 위대한 래퍼라고.

 

감정이 여린 10대들 못지않게 오십 대가 되어도 부모가 되어도 감정은 뭐 그렇게 넉넉하게 단단해질 줄 모른다는 사실을 10대들은 잘 모른다. 그저 그런 척하면서 살아낸다는 걸 잘 모른다. 실패의 경험이 더 많아 지금은 좀 괜찮은 척하고 사는 거라는 걸 잘 모른다. 아재리아, 꼰대라떼의 세상이 실패의 무덤 위에서 태풍, 소나기, 폭염, 한파, 먼지를 다 이겨낸 가녀린 꽃대라는 걸 잘 모른다. 우리때처럼 여전히. 

 


사람은 누구나 지금 당장 그저 세상 편한 방식으로 자기를 가두려고만 한다. 본능에 가깝다. 그 순간은 잊을 수 있고, 잠시라도 외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밋밋한 일상 마디마디에서 꿈틀거리는 유머러스한 비트가 있어 살만하다. 몸나이가 들면 그 유머와 비트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흉내 낼 수 있는 여유가 조금은 더 생기는 게 좋다. 유머와 비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 꽃대를 지켜내는 여유. 

 


그렇게 그 비트에 나도 한 숟가락 슬쩍 얹히면서 오늘도 화려한 조명 없는 어둑한 무대 위에서 욕바지 래퍼로 살아내는 내가 좋다. 오늘도 예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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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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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그리워질 [지금, 여기, 언제나 오늘]에서 1일 1여행 중에 생명의 설렘을 찾아 읽고 쓰고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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