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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만난 친절
루디린23. 05. 21 · 읽음 90

  십삼년 전의 일이다. 내가 인솔하여 일본 간사이 지방으로 가족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나도 그렇고 형제들도 그렇고 패키지 여행보다 자유 여행을 선호해서 용기도 가상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한 자유여행으로 일정을 짰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스마트폰과 구글맵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아서 여행 책자와 지도에 의존해서 오사카와 그 근방의 교토, 나라 등의 지역을 방문했다.

 

  여행 책자에서 알려주는 대로 더듬더듬 찾아 다녔는데 길을 잘 찾지 못할 때면 엄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성화셨다. 한참 책자와 지도를 들여다보다 결국 포기하고 지나가는 일본인들에게 길을 물어볼 때면 일본어도 잘 하지 못해서 손짓까지 동원해야 했다. 

 

  급행을 타야 하는데 완행을 타기도 하고 길을 잘못들어 다시 걸어나오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여행의 재미였다. 나도 초행길이었고 가족들까지 함께 하는 여행이라 많이 걱정했는데 그래도 큰 무리 없이 계획했던 곳들을 방문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여행 중반을 넘어서 진짜 위기가 찾아왔다.

 

  오사카에 숙소를 두고 근처 지역을 방문할 때는 열차를 이용했는데 그날은 교토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아라시야마 대나무 숲길을 거닐고 금각사와 청수사를 방문했다. 우연히 들러 점심을 해결한 우동집의 음식은 일본에서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었다. 교토의 거리를 거닐며 기념품도 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날이 저물어 이제 숙소로 돌아가려고 열차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해가 지자 어두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데 버스가 점점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분명 열차역으로 우리를 데려다줘야 할 버스가 다른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불안했다. 밖은 어두워지는데, 숙소는 오사카에 있는데, 어두운 밤에 교토에서 오사카까지 어떻게 가야할지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당황스러웠다. 여행 책자와 버스 노선표를 번갈아가며 버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살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나 혼자였다면 마음이 좀 덜 불편했을 텐데. 나만 바라보는 가족들이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버스에 앉아 있다 나의 불안에 전염되기 시작하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정 안되면 택시를 타도 되고, 더 안되면 근처에라도 숙소를 잡으면 되니까, 여러 가지 해결 방안들을 생각하며 진정하려 애썼다. 

 

  그때, 붐비던 버스 안에서 여전히 여행 책자와 버스 노선표를  번갈아 보며 공황에 빠져있던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고개가 번뜩 들렸다. 어떤 여자분이었다. 그 분은 일본인이었는데 한국 드라마를 좋아해서 한국어를 조금 공부했다고 했다. 지금처럼 한류, 케이컬쳐가 전세계를 휩쓸던 때가 아니라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을 만나게 된 것이 매우 신기했다. 사실 그 분은 한국말을 잘 하지는 못했다. 내 일본어보다는 나았지만 그 분도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서 우리 둘은 아는 단어를 최대한 동원해서 띄엄띄엄 대화를 주고받았다.

 

  자신의 부족한 한국어 실력을 생각하며 나를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그 분은 어려움에 처한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주고 나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버스를 잘못 탄 나에게 목적지를 물어보고 오사카 숙소로 돌아갈 수 있도록 가까운 열차역으로 안내해주었다. 가는 길만 알려줘도 되었을 텐데 버스에서 내려 열차역까지 함께 걸어가주었다.

 

  그 분 덕에 우리 가족은 까만 밤에 낯선 길을 헤매지 않고 숙소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나머지 여행 일정도 무사히 마쳤고 우리는 일본 여행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십삼년이 지났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작은 친절은 그 어떤 여행의 추억보다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작으면 작다고 할 친절과 선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경험한 나는 나도 그런 선의와 친절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뭔가 고심하는 듯한 외국인 관광객을 보며,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가는 할머니를 보며 막상 말을 건네볼까 싶다가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어쩌지 주저하다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다. 

 

  세상은 커다란 선의가 아닌 작은 선의들로 움직이고 바뀌어간다고 믿는다. 여지껏 내가 건네받은 작은 선의와 친절을 다른 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작은 연결고리가 될 수 있기를. 오래 전에 여행지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을 생각하며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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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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