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4일
드디어 씨앗을 이름도 어렵고 처음 들어 본 지피펠렛(이하 펠렛)에 올렸다. 심었다는 표현보다는 올렸다는 표현이 조금 더 가까울 듯하다. 실제로 펠렛 위에 씨앗을 살짝 올리는 느낌으로 심는 듯 아닌 듯했기 때문에 올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키트를 처음 받았을 때의 귀여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되지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펠렛은 뭐지? 다른 식집사 분들의 글을 읽어 보고 기본적인 가이드를 보니 펠렛을 물에 불리고 그 위에 씨앗을 올리라고 하는데 그냥 바로 흙, 그러니까 화분에 상토를 채우고 거기에 심으면 안 되는 건가? 씨앗이 상당히 작아서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바로 심기엔 조금 부담스러운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로 심으면 안 될까 하는 의구심과 귀찮은 마음이 계속해서 일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초보 식집사로서 마음대로 뭘 할 수는 없었다. 우선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어제 시도를 해 보려다 3개의 펠렛을 따로 담을 용기가 필요할 듯하여 하루 더 미루고 고민을 했다. 키트에 동봉된 펠렛 전용 화분이 하나 있는데 비슷한 크기의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두루마리 휴지심이 제격일 거 같았는데 휴지심을 당장 구할 수는 없었다.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기 위해서 화장실에 얌전히 자기 자리에 걸려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홀랑 벗겨 내야 했다. 아, 이건 좀 아닌데... 하면서 재활용으로 모아 둔 종이쓰레기를 뒤적거렸더니 며칠 전 먹은 햄버거 세트의 콜라를 담은 종이컵이 보였다.
아하!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잘라 써야겠다 싶어 바로 주워 들어 물로 한 번 헹구고 과감하게 잘랐다. 펠렛보다 지름이 훨씬 큰 종이컵이었지만 담기엔 나름 괜찮았다. 제공된 펠렛 화분에 하나, 잘라낸 콜라 종이컵에 2개를 따로따로 담아 펠렛을 불릴 준비를 마쳤다.
집에 있는 분무기를 통해 물을 천천히 뿌렸다. 바로 부풀어 오르진 않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가만히 지켜봤다. 당연히 당장 부풀어 오르지는 않았다. 물을 더 뿌렸다.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더 뿌렸다. 그리고 가족들과 산책을 나가기 위해 준비를 조금 했다.
다시 돌아와 확인했다. 아직 만족스럽게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물을 더 뿌렸다. 역시 지켜봤다. 거북인가 싶을 정도로 천천히 아니 사실 별 변화가 없어 보였다. 아내가 옆에서 거들었다. ‘물을 더 많이 뿌려 봐.’ 순간 아하! 가이드에서도 펠렛을 물에 충분히 담그라고 했지. 물을 더 과감하게 뿌렸다. 그랬더니 반응이 조금 오는 거 같았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깨보다 한참 작은 총 11개의 씨앗을 4, 4, 3개로 나눠서 펠렛 위에 올렸다. 이어서 앙증맞지만 날카로운 모종삽을 이용해 펠렛의 흙(?)을 씨앗에 묻히는 느낌으로 살살 덮었다. 다 된 건가? 아! 수분 유지를 위해 비닐을 덮으라고 했지. 비닐롤팩을 한 장 뜯어 펠렛을 담아 둔 3개의 용기를 옹기종기 모아 놓고 덮었다.
너무 작은 씨앗에 헛웃음이 나오면서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아내와 의견을 나눴는데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필명을 그대로 쓸까? 아내가 붙여 준 내 별명 중에 하나인 고릴라를 이용해 지을까? 한 때 아내가 아기돼지를 뜻하는 스페인어로 스마트폰에 내 번호를 저장해 둔 적이 있는데 그걸 써먹을까 등등 고민하다 지금 글을 쓰기 직전 결정을 했다.
‘별님’, 종교가 없는 내가 믿고 기대는 존재이며 딸의 이름이기도 한 별님으로 결정했다. 다소 평번한 이름이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라는 관점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춰 결정했다. 임파첸스 대즐러의 꽃말도 사랑과 관계있으니 괜찮은 거 같았다. 일단 기본적인 과정은 마친 듯하여 관리카드와 캘린더에 기록도 하고 가족들과 산책을 나갔다.
마침 다음 날인 6월 5일이 아내와 사귀기 시작한 지 2,500일 되는 날이라 기념일 전야제의 의미로 저녁에 닭강정과 맥주를 한잔하기로 해서 산책을 하면서 집 앞 상가로 닭강정을 사러 나갔다. 산책 겸 닭강정 쇼핑을 마치고 들어 와 다시 물을 뿌리고 2,500일을 기념했다. 씨앗도 심었고 산책도 하고 닭강정도 먹고 맥주도 마시고 2,500일도 기념하는 즐거운 일요일 저녁이었다.
잠자리 준비를 하고 아이를 재운 뒤에 다시 물을 뿌려 줬다. 습도를 유지해야 되는데 과습은 안 된다는 가이드의 내용을 충실하게 따르고 싶었지만 적정선을 잘 몰라 물을 펠렛에 뿌리면서도 너무 적게 주는 건가, 아니 너무 많이 주는 건가 계속 고민을 했다. 무슨 배짱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3~5시간 간격으로 물을 주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물을 줬다.
하루 밤을 보내고 아침에 확인해 보니 당연히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분명히 며칠 길게는 1~2주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너무 성급한 거야 하면서 물을 다시 뿌려 줬다. 그렇게 일을 나가고 마치고 들어 와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도가 지난 시점, 아직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중간에 하나의 펠렛에 올린 씨앗이 너무 노출된 듯하여 모종삽으로 살살 건드렸는데 처음보단 약간 물에 불은 듯 한 씨앗을 잘못 건드린 거 같아 영 마음이 찜찜한데 부서질세라 살살했으니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건 물을 주는 거밖에 없어 미안한 마음을 담아 물을 뿌려 줬다.
괜찮겠죠? 별님!
이야기하는늑대
살아 온 이야기, 살고 있는 이야기, 살아 갈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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