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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듯 빨간, 봉숭아물
북캉스23. 06. 19 · 읽음 390

 작게 가꾸는 옥상텃밭에는 해마다 하얗고 발그레한 붉은 꽃이 핀다. 5년 전 딱 한 번 씨앗을 뿌린 이후로, 봄이 되면 이 화분 저 화분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 꽃의 새싹이 올라온다. 작년 가을에 잘 여문 씨방에서 튕겨 나간 통통한 이 꽃의 씨앗들이 사방팔방으로 떨어져 겨우내 잠을 자다가 봄의 따스한 기운에 잠에서 깬다. 이 꽃은 바로 한국의 임파첸스, 봉선화다.

 

 올해도 어김없이 흙 속에 숨어있던 봉선화 씨앗이 봄이 되자 여기 저기 싹을 틔웠고, 오히려 너무 많은 새싹이 올라와 뽑아주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아이들 손톱에 물 들여줄 봉선화 몇 그루만을 남겨두고 다 뽑았건만, 며칠 뒤엔 새로운 곳에서 쏙 하고 새싹이 올라와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여름만 되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였다.  할머니가 절구통에 봉선화꽃과 이파리를  따다 넣으면 오빠와 내가 번갈아 절구공이로 콩콩 찧었다. 가끔은 할머니가 명반을 너무 많이 넣어 손톱이 검붉게 빨갛다 못해 손톱 옆의 살까지 까맣게 익어버렸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까지는 오빠와 함께 열손가락을 쫙 펴고 할머니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오빠가 중학교에 가고 나서는 나 혼자만 할머니 앞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빻아놓은 봉선화꽃을 콩알만큼 집어 내 손가락에 올려놓고는 미리 잘라놓은 비닐봉지로 돌돌 말아 비닐끈으로 풀어지지 않게 꼭 묶어주셨다. 자는 내내 손가락이 근질거리고 욱신거렸지만 빨간 열 손톱을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밤새 풀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내 손톱은 빨간 고추장보다 더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할머니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은 김칫국물이 밴 듯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 아이들에게도 여름의 추억을 심어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네댓 살 되던 때부터 여름마다 봉숭아물을 들여주고 있다. 여름 한 낮의 뜨거운 햇빛에 바짝 약오른 봉선화꽃으로 물을 들여야 쨍하도록 빨간 손톱을 얻을 수 있다. 아이들도 이제는 이 신나는 의식의 절차를 잘 알고 있다. 한낮의 햇빛을 충분히 받은 봉선화꽃과 이파리를 따서 커다란 돌을 주워다가 콩콩 찧는다. 비닐랲과 가위를 가져다놓고 나란히 앉아 손가락을 쫙 펼친다. 그럼 나는 그 옛날 나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의 손가락에 마법을 부린다. 첫째아이는 다음날 아침까지 진득하게 참고, 둘째아이는 두 시간 후면 풀어달라고 손가락을 내 얼굴에 들이민다, 매해 어김없이.

 

 요즘은 봉숭아물을 들이는 아이들이 별로 없는지, 우리 아이들의 빨간 손톱은 여름마다 학교에서 인기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한 지인에게 봉선화꽃을 좀 줄까 물었더니 절대 주면 안된단다. 무슨 뜻인지 알고는 서로 웃었다. 아이들에게는 재미나지만, 물을 들여주는 어른의 입장에선 상당히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벌써 봉선화꽃과 이파리를 따왔다. 돌도 구해왔다. 명반을 준비해달라고 해서 조금 꺼내두었다. 오늘 저녁에는 열 손가락 쫙 펴고 내 앞에 앉아 있겠지. 올해는 좀 빨리 핀 봉선화꽃이 있어서 다른 때보다 이른 의식을 치르기로 했다. 귀찮은 일임에도 내가 매해 여름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들과 나와의 추억도 추억이지만, 아이들이 변화하는 계절을 알아차리고, 계절을 느끼고 즐길 줄 아는 마음이 여유롭고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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