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우리 곁을 떠날 줄은 몰랐어요. 엄마는 말했었죠. 네 아빠가 전근이 잦아서, 같이 살기는 글렀다고요. 엄마가 아빠 몫까지 해 주마, 칼싸움도 변신 로봇 조립도, 성교육도, 다 내가 해 주마, 너희들은 이 엄마가 지켜 줄 거란다, 그렇게 큰소리치시더니 코로나라는 무시무시한 병이 덮쳤던 첫해, 엄마는 갑자기 강원도 시골 마을로 떠났어요.
엄마는 주말에만 왔어요. 그냥 그만두면 안 돼에? 졸랐지만 소용없었어요. 아빠 혼자 벌어서는 우리 학원비 내기도 힘들고, 배달 음식도 마음대로 사 줄 수가 없어서, 엄마도 돈 벌어야 한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명작 떡볶이 치킨'이 인질로 잡혔으니, 싫다는 말을 다시 못 했죠.
엄마는 주말마다 바빴어요. 화장실을 락스 뿌려서 박박 닦고, 우리 책상을 다 헤집으면서 연신 한숨을 쉬셨어요. 애 맡긴 내가 죄인이지, 누구를 탓하겠냐, 혼잣말이 아닌 것처럼 다 들렸어요. 엄마가 한탄을 시작하니, 할머니가 한마디 거드셨어요. 하, 큰일이었어요.
“그렇게 자신을 들볶지 마라. 집 좀 더러우면 어떠니? 애들이 엄마 없어도 자기 할 일 자알 하는데, 주말엔 너도 좀 쉬고...”
“어떻게 쉬어요? 애들 방이 저 모양인데, 거실장에 먼지가 소복한데, 이렇게 두면 호흡기에도 안 좋다구요! 그리고 환기 끝나면 창문 좀 닫아 두시라고 했죠? 베란다 창틀에 새까만 먼지가 가득해요! 지난주에 다 닦아뒀는데, 아휴, 내 팔자야...”
“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너도 잘 알다시피, 나도 애들 곁에 있으려고, 다아 내려놓고 여기 와 있는 거다. 나도 내 방식이라는 게 있는데, 네 식을 강요하지 마라.”
할머니가 방문을 닫고 들어가셔서 다행이었어요. 할머니가 방 밖으로 나오실 때마다, 또 다투시면 어떡하지, 걱정했거든요. 엄마는 할머니랑 지내는 게 싫었나 봐요. 할머니는 엄마가 부탁해서 우리 집으로 오셨는데, 왜 변덕을 부리는 걸까요?
엄마가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요일 저녁이 되면 또 한 번 폭발했어요. 엄마가 만들어준 시간표대로 공부해라, 책 좀 읽어라, 방 좀 잘 치워라, 잔소리를 끝도 없이 퍼부었어요. 저는 참다가 울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이럴 거면, 엄마, 집에 오지 마! 얼른 가!”
저도 힘들었어요.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친구들도 못 만나고요. 유일한 낙은 햄스터를 데리고 노는 거였어요. 형이랑 찌돌이 간식도 먹이고 손바닥에 올려놓고 등을 쓰다듬을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찌돌이가 제 양말을 깨물어도 좋았어요. 별로 아프지 않고 귀엽기만 했거든요. 그거 말고는 형이랑 자전거 타거나 어벤저스 피규어 가지고 노는 게 취미가 되었어요. 형이나 동생이 없는 애들은 저보다 더 심심했겠죠.
매일 8시 반에 일어나서 할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을 먹고, 티셔츠만 갈아입고 컴퓨터 앞에 앉았어요. 바지는 잠옷이어도 아무도 모르잖아요. 더 늦게 일어나면 쉬는 시간에 밥을 먹었어요. 1교시 쉬는 시간에 반 공기, 2교시 쉬는 시간에 나머지를 먹으면 되거든요.
“욘석아, 깨울 때 일어나서 밥 먹지, 다 식은 밥이 무슨 맛이니?”
그럴 때마다 멋쩍게 웃었어요. 실은 엄마를 닮아서 아침잠이 많은 타입이거든요. 형과 모니터를 마주하고 오전 내내 작은 화면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났어요. 학교, 친구를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는데, 5학년이 되니 갑자기 학교에 나오라고 해서 싫었어요. 어차피 학교에 갔어도 친구들하고 손잡고 어깨동무도 못 했어요. 제일 슬펐던 건, 피구를 못 하는 거였어요. 피구는 여자애들도 좋아하는 인기 스포츠거든요. 코로나가 옮을까, 뭐든 조심하고 정작 좋아하는 건 못 했죠.
엄마가 일하러 가고 나면 보고 싶고, 주말에 돌아오면 반가웠다가, 다시 갈 때가 되면 온 집안이 먹구름으로 뒤덮였어요. 그래도 엄마가 우리를 사랑하는 건 맞아요. 왜냐하면 매일 저녁 전화로 책을 읽어줬거든요. 엄마는 온라인 헌책방에서 중고로 어린이 책을 샀대요.
아프리카에서 처음 발견된 인류의 화석 이야기를 읽고, 인간은 손이 아닌 엄지발가락 덕분에 동물보다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엄지발가락이 크고 튼튼하지 않았다면, 두 다리로 서서 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을 거라는데, 엄마도 이건 처음 알았대요. 이태석 신부님이 아프리카 수단에서 전쟁과 가난 때문에 아파도 치료받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도와주셨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신부님이 대장암으로 아파서 돌아가셨다는 부분에서 엄마는 막 울었어요. 참, 우리 엄마는 동화책 읽다가도 우는 사람이거든요, 에휴.
엄마가 안 계셨어도, 아빠랑 같이 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아빠를 기다리다가 먼저 잠든 날도 많았지만, 그래도 따로 살 때보다는 자주 볼 수 있었어요. 아빠는 밤늦게 TV 보는 걸 허락해 주셔서, 심야 괴담회도 같이 봤어요. 사실 아빠는 소파에서 먼저 주무셔서 형이랑 본 거죠. 같이 캐치볼도 하고 장난도 많이 치고 자기 전에 웃긴 얘기도 하고요. 아빠를 보는 눈에는 여전히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할머니, 아빠랑 서울에서, 엄마는 시골에서 3년 동안 이렇게 살았어요. 친할머니 집에 한 번도 못 갔고요. 캠핑 텐트랑 침낭은 베란다에서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우리 캠핑 언제 가는 거니? 애처로운 눈빛으로 물어보곤 했어요. 가끔 베란다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후식으로 컵라면 먹는 날은 로또 맞은 거나 마찬가지죠. 엄마, 아빠가 와인을 드시고 불멍 램프까지 켜시면 더 좋고요. 그런 날은 평소에 못 했던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을 원 없이 하고, 새벽까지 유튜브로 브롤스타즈 게임 영상을 볼 수 있거든요.
코로나 뉴스는 점점 줄어들었는데 엄마의 한숨은 늘어만 갔어요. 아빠가 경상도로 전근 가실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거든요.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니? 증말 미치겠어... 그래, 서울로 보내 달라고 버얼써, 여어러 번 얘기했지... 뭐라하긴, 안 된대. 승진하고 싶으면 좀 더 있으라고... 야, 3년 넘게 육아 휴직한 년이 경쟁력이 있겠니? 승진하면 또 어디로 보내겠지, 승진했으면 더 열심히 일해야지? 그러면서... 5년 있으면 경호가 대학 가잖아, 이 시기에 애들 떼어 놓는 게 맞나 싶다, 그렇다고 매번 전학시킬 수도 없고...”
이모랑 전화하면 맨날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3년 내내 고민하던 엄마는, 빌어먹을 코로나보다 더 지랄 맞은 직장을 먼저 잘라냈대요. 이제는 아빠가 경상도로 전근 가시고, 엄마랑 같이 살아요. 주말에 몰아서 듣던 잔소리를 매일 나눠서 들으니, 이것도 짜증 나요. 아빠 혼자 벌면 치킨 자주 못 사 주신다더니, 치킨은 가끔 사 주시는 대신, 영어학원을 끊었어요. 학원 안 가니 좋겠다고요? 우리 엄마한테 영어 배워보세요. 학원 선생님보다 더 악랄하게 가르친다고요. 문장 하나하나 다 읽고 우리말로 바꿔보라고 시키고요, 단어 모르는 거 들키면 불호령이 떨어져요.
그래도 저는 형보다는 나아요. 제가 보기에는 형이 나랑 잘 놀아주고 참 착한데, 엄마는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 엄마가 혼내면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이놈의 시키, 말대꾸나 하고 태도가 글러 먹었다, 낼모레 고등학교 갈 놈이 공부를 그 정도밖에 안 하냐, 매일 같이 형을 다그쳤어요. 착한 형은 잘 참다가 요 며칠 전부터는 그만 좀 하라고요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나팔처럼 부풀려서 엄마한테 큰소리도 치더라고요. 사춘기와 갱년기의 싸움. 보는 것도 속상하지만 못 말려요.
저도 자주 혼나요. 엄마가 입사지원서 쓴다고 바쁠 때 몰래 숨어서 게임하다가 들켰거든요. 엄마가 자주 감정조절에 실패하는 갱년기라서, 하필 이럴 때 우리랑 같이 살게 되어서 부담스러워요, 그래도 저는 엄마가 좋아요. 할머니한테 많이 미안해하시던데 어서 화해하시고, 저희한테는 관심 좀 덜 가지시면 좋겠고요. 어서 다시 출근해서 맛있는 커피 사드시고, 지금보다 더 자주 웃으셨으면 좋겠어요.
지영민
건강한 삶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누고픈 지영민입니다. 그림책 도서관을 운영하는 할머니 작가가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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