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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수박, 꿀수박이요!
지영민23. 06. 27 · 읽음 264

랜선 장보기로 수박 한 통을 시켰다. 수박이 움직이거나 충격받지 않도록 완충 상자에 담겨 왔다. 껍데기를 닦고 통통 두드려 보니 탱탱한 진동이 느껴진다. '제가 크기는 좀 작아도 잘 익은 수박이라고요.' 속삭인다.

 

날 닮아, 아장아장 걷던 시기부터 수박을 유난히 잘 먹는 중학생 큰 녀석이 헤죽 웃는다. 5월 수박은 덜 익어서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요 며칠 전에 또 수박 타령을 했었다. 욘석들이 뭘 먹고 싶다고 하면 내 머릿 속 'to do list' 1번으로 저장되어 수시로 알람이 울린다. 오늘 오전 수박을 주문한 건 이 알람 때문이었다.

 

큰 애가 수학학원에 가 있는 동안 김치냉장고에 넣어둬야 한다. 누굴 닮았는지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녀석이라, 6월 말 더위로 미적지근해진 수박을 시원하게 식히기 위해서다.

 

절반은 발라낸 속만 깍둑썰기해서 일반냉장고에, 나머지 절반은 껍데기째 통으로 수박용기에 넣어 김치냉장고에 보관하기로 했다. 싱크에 올려놓고 식도 끝을 조금 찔러 넣었다. 꽉 찬 속이 작은 틈을 벌려 내며 칼날을 따라 투두둑, 갈라졌다. '거 봐요, 잘 익었다니까.' 이렇게 거들먹거린다.

 

발그레하게 익은, 꽉 찬 속을 보니 한 통 사길 잘 했다 싶다. 나 어릴 적, 커다란 수박 한 통은 우리 여덟 식구에게 딱 좋은 크기였다.

 

시원하게 식힐 틈도 없이, 숭덩숭덩 급히 썰려 큰 쟁반에 담긴 부채꼴의 수박조각들이, 아기새처럼 재촉하는 아이들 앞에 놓인다. 철부지들은 한 조각이라도 더 먹으려고 입 안에서 급히 씨를 발라낸다. 엄마는 속살을 남김없이 발라 먹으라고 잔소리하며, 애들이 먹다남긴 수박조각을 대신 발라드신다.

 

'시골 할머니가 서울 아들 집에 놀러왔는데, 글쎄 수세식 변기에 수박을 담가뒀더래. 할머니는 물이 담긴 변기를 난생처음 보셔서, 수박 담가두기 딱 좋은 욕조인 줄 아셨던 거지.'

아마도 80년대 어느 라디오 사연으로 소개됐을 법한, 웃긴 이야기를 하면서 달콤한 수박으로 불끈 솟은 배를 쓰다듬었다.

 

그 시절 엄마는 '이동식 노점상'에서 산, 수박을 노끈 그물에 넣어 들고 오셨다. 무거운 수박을 '끙'하며 내려놓은 엄마 손에는 노끈 자국이 선명했다.

 

수박철이 되면 '수박 장수' 아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레를 끄셨다. 수레에는 굴러가지 않도록 동그란 고리 위에 괴어 둔 수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엄마는 꼭지가 싱싱하고 줄무늬가 선명한 놈들을 추려내어 통통 두드려 봤다.

 

엄마가 고개를 갸우뚱하면 아저씨는 식도 끝으로 작은 삼각뿔 조각을 잘라내어 건네며, '먹어보슈, 달아요, 이거 꿀수박이요!' 하신다. 꼬맹이도 한 번 먹어봐라 하며 한 조각 더 건네신다. 감질나서 구입하게 만드는 장사 기술이었을까, 자기가 파는 농산물에 대한 자신감이었을까.

 

2023년 산 수박은 스마트폰을 몇 번 터치하면 문 앞에서 받아볼 수 있다. 네 식구가 한 번 먹기 벅찰까 봐, 반통수박으로 쪼개팔지 않아도 되도록 몸집도 작아졌나 보다. 그래도 입에서 토독거리며 녹는 듯, 서걱서걱 부스러지는 듯한 묘한 식감과 순도높은 달콤함은,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 싱거운 '흰 살' 주변은 먹기 싫어 남기던 꼬맹이는, 자식들이 남긴 수박을 아까워 하는 엄마가 되었다. 2023년의 엄마는 안타깝게도 껍데기 흰 살로 감칠맛 나는 무침을 만들 줄은 모른다. 그나마 그녀가 만들 줄 아는 수박화채는, 화려한 음료 맛에 길들여진 요즘 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빛바랜 과거가 가끔은 그립다. 그럴 땐 잘 익은 수박을 가르며 추억의 조각을 맛본다. 달콤하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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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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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삶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누고픈 지영민입니다. 그림책 도서관을 운영하는 할머니 작가가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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