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날 며칠 비가 내리던 어느날, 모처럼 해가 떠서 텃밭에 갔다. 비가왔으니 작물들이 싱싱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할 줄 알았는데 완전한 오산이었다. 비가 계속해서 내렸으면 좋았을 테지만, 비가 쏟아지다 해가 쨍쨍하고 또 비가 쏟아지다가 해가 쨍쨍한 이상한 날씨 덕분에 우리 텃밭 작물들은..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손가락크기만큼 컸던 오이들은 다 죽었고 겨우 피워낸 가지꽃 두송이도 열매를 보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으며, 벌레 하나 안먹고 효자노릇하던 적상추는 거의 상추절임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상태가 심각한건 바로 강낭콩이었다. 잎사귀가 다 시든것도 모자라 메인사진에 보이다시피 열린 강낭콩도 껍질이 흐물흐물해져 저절로 벌어지고 있었다. 수확해봤자 안에 콩이 기대가 되지 않아 그냥 집에 왔는데 친정엄마는 달랐다. 그래도 뚜껑은 열어봐야하지 않겠냐고 따오신것이 아닌가. 그래서 열어봤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런데..오! 총 네개의 꼬투리에서 12개의 콩이 나왔다. 신기했다.
사실 이 강낭콩은 내가 키우고자 한것이 아니라 첫째아이가 학교에서 받아온 키트였다. 그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진건 아니지만 마침내 또 이렇게 결실을 보니 왠지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그래서 딸에게 이 중에 가장 큰 강낭콩 세개를 학교에 가져가서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보여주라고 비닐봉지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어제 아침. 딸이 급하게 나를 불렀다.
딸: 엄마엄마!
나: 응?
딸: 엄마 이거 싹났어!
나: 응!????????????????????
싹났다는 말에 가서 보니 싹이 아니라..세상에 세개 다 뿌리가 나와있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하고(;;;;) 그래서 한참을 지켜보았다. 도대체 남들이 하는것처럼 키친타올에 올려놓은것도 아닌데 왜 뿌리가 이렇게나 쑥쑥 자란것인가. 조금은 무서운(?)마음으로 계속 보고 있으니 지나가던 남편이 한마디 건넸다.
"습하잖아 그 비닐 안이"
아! 그랬다. 그 말을 듣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비닐안에 물기가 조금 보였다.
나: 남편! 이거 텃밭에 상추 뽑아버린 그 자리에 심을까?
남편: 지금?
나: 좀 그런가?
남편: 너무 늦지 않았어?
그렇다. 지금은 폭염주의보가 성행하는 여름이다. 늦긴 늦었다. 그래서 쿨하게 포기하고 딸에게 그냥 가서 보여주라고 말하며 가방에 다시 넣어주었다. 그런데..자꾸 마음이 심란했다. 정말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살려달라는 강낭콩들의 외침을 내가..외면한것만 같았다. 아..이 식집사 본능..그래서 벌떡일어났다. 세 알을 다 심기에는 화분도 없었고, 흙도 없어서 가장 뿌리가 긴 녀석을 꺼내고 딸아이를 불렀다.
나: 딸! 이리와바! 강낭콩 심자
딸: 강낭콩 심자고!?
나: 응응 심자.
그렇게 이루어진 강낭콩 심기. 집에 남은 상토가 별로 없어서 급 중단될뻔했지만 그로로에서 준 슬릿분이 갑자기 떠올라 그곳에 남은 흙을 탈탈 털어보니 오! 딱 맞았다. 진짜 운명처럼 딱 꽉! 찼다.
강낭콩 살짝 올려놓고 그 위에 흙을 살짝 덮어주었다. 항상 흙은 살짝 덮어줘야한다. 파종을 할때도 마찬가지다. 너무 깊게 심으면 여리고 여린 씨앗들이 바깥으로 고개를 들기가 너무 힘들다.
처음에 화분으로 쓰려고 했다가 흙이 모자라 탈락한 플라스틱 반찬통(배달시켜 먹은 음식 반찬통;)은 슬릿분의 받침대가 되었다. 다 심고나서 딸은 물을 줘야겠다며 작은 약병같은 분무기로 칙칙 뿌려주었다.
이렇게 강낭콩 심기 완료! 화분을 더이상 늘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또 새롭고 익숙한 식구가 또 늘었다. 강낭콩만 세번째다. 작은 화분만 여섯개다. 아하하하....
우리 주니어들이 너무 잘커서 그로로에 계신 많은 식집사분들이 내가 엄청나게 식물을 잘키우는 프로 식집사라고 생각해주시는데, 사실 정말 절대 아니다. 나는 평생에 걸쳐 식물공포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고, 지금도 여전히 식물들이 있는곳에 가면 겁부터 난다. 다행히 이제는 식집사로 2년간 살면서 내공이 생겨서 공포심은 가장먼저 대면해야하는 감정이지만 가장 빨리 사라지는 감정이기도 하며, 어느정도는 누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요새 느끼는건, 조금씩 내가 진짜 식물을 좋아하는 구나, 라고 느끼는 순간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뭔가 자꾸 키우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식물을 매개체로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욕구.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칠때면 나에게 조금의 활력을 주는 존재들. 말 그대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
세번째 키우는 강낭콩, 아까 베란다에 가서 살짝 보니 잔뿌리가 여러개 튀어나왔다. 쑥쑥 자라길. 환영해 강낭콩.
파초청녀
커피를 사랑하고, 환경지키는것에 관심이 많으며,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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