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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식물] 뿌리와 줄기 사이
아피스토23. 07. 27 · 읽음 252

 

어느 날, 저의 식물방으로 대학 선배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스물네 살의 조카를 데리고 왔습니다. 선배는 자신의 조카가 식물에 관심이 많아 저의 식물방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카는 제가 키우는 식물들을 보자 눈이 반짝거립니다. 

 

저 역시 그의 조카가 식물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와 어디에서부터 초점을 맞추고 대화를 시작할까 즐거운 고민에 빠집니다. 그가 식물 잎의 질감이나 형태, 무늬, 패턴 등의 미감을 즐기는 ‘관엽식물파’인지, 아니면 다양한 색깔과 화려한 색감의 꽃을 좋아하는 ‘꽃식물파’인지부터 궁금해집니다. 그것도 아니면, 나무를 좋아하는 ‘목본식물파’인지, 연한 초록색 줄기를 가진 식물을 좋아하는 ‘초본식물파’인지 궁금해지는 것이지요. 더 있습니다. 열대우림에 사는 열대관엽식물을 좋아하는지, 사막 지역에서 자라는 아프리카 식물을 좋아하는지, 고사리와 같이 포자로 번식하는 양치식물을 좋아하는지, 암술과 수술이 만나 종자로 번식하는 식물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조카가 말합니다. 

 

“저는 테라리움에 관심이 있어요.”

‘아차, 그건 생각을 못했네.’ 

 

그러니까 작은 유리 케이스 안에 작은 정글을 만들고 싶은지, 아니면 나의 공간 전체를 정글로 만들고 싶은지도 궁금했어야 합니다. 그가 테라리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축소된 정글을 좋아하는 쪽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그는 제가 만들어놓은 테라리움을 유심히 봅니다. 테라리움에 들어간 식물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었는지 꼼꼼하게 살펴봅니다. 다행히 테라리움에는 저도 관심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대화의 초점을 맞출 수 있었죠.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직접 만든 테라리움 작품도 있어?”

 

그는 수줍게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며 직접 만들었다는 테라리움 사진을 보여줍니다.  

 

“오!”

 

사진을 보니 테라리움을 만드는 수준이 보통은 아니었습니다. 테라리움의 매력 중 하나를 꼽는다면 유리 케이스 안에 다양한 식물들을 배치하여 가장 자연과 비슷한 모습으로 꾸미는 것입니다. 자연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유리 케이스 안에 식물들을 ‘자유롭게’ 넣으면 될 것 같지만, 사실 테라리움을 제작하기 전부터 정교하게 구도를 잡고 꼼꼼하게 계획을 해야 합니다. 

 

그 안에 들어갈 식물들 역시 세밀하게 배치해야 하지요. 그 이유는 식물마다 좋아하는 빛의 세기와 습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테라리움의 재료로 많이 사용하는 깃털이끼가 특히 그렇습니다. 이끼가 조명에서 너무 가까우면 갈색으로 변해 말라버리고, 이끼가 조명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웃자라면서 잎의 모양이 미워집니다. 그런데 솔이끼는 또 전혀 다릅니다. 솔이끼는 빛을 좋아하고 건조에도 강해서 다른 이끼보다 조명을 가까이 배치를 해야 잘 크죠. 이끼 하나에도 원하는 조건이 제각각입니다. 하물며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작은 유리 케이스 안에 넣어서 안정적인 생태계를 유지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는 테라리움의 균형감 있는 구도가 무엇인지 아는 듯했습니다. 식물들이 제각각 적절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구도를 흐트러뜨리지 않았지요. 저는 갑자기 그의 전공이 궁금해져서 물었습니다. 그는 더욱 초롱초롱해진 눈빛으로 대답합니다. 

 

“고졸입니다.”

 

저는 다시 아차, 싶었습니다. ‘내가 무슨 근거로 이 친구가 대학 전공자일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 세상에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데 말야.’ 그러나 그는 ‘고졸’이라고 답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전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이른바 그는 ‘자발적 대학 비진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여느 수험생들처럼 대입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대학진학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좀더 일찍 사회에 나가 내 적성을 찾고 싶다고 말했고, 부모님도 그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명확한 진로를 정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관심 있는 것부터 경험하고 싶었어요. 그 처음이 요리였고요. 졸업 후에 바로 요리를 배우면서 현장 경험을 했지요. 요리는 꼭 대학을 나와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군 제대 이후에는 테라리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요리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테라리움에 관심이 생겼다고 하면 의아해 할 수 있지만, 무언가를 손으로 섬세하게 창조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이 둘은 매우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테라리움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테라리움 만드는 법을 영상으로 찍어보면 어떨까?”

 

저는 그에게 저의 유튜브 채널 출연을 제안했습니다. 촬영까지는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짧은 준비 기간이었지만, 그가 촬영을 위해 준비해온 것들을 보니, 테라리움을 즐기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죠. 스물네 살의 이 청년은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알았습니다. 그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는 명동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테라리움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그는 한순간 성장의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보였지요. 


열대관엽식물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잎 한 장에 얇은 뿌리 하나가 겨우 달려 있는 몬스테라의 삽수묘(줄기를 잘라 뿌리를 내린 번식 개체)를 화분에 심어놓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새 잎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애가 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 잎 한 장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새 잎을 뽑아냅니다. 

 

식물은 줄기와 뿌리의 비율이 비슷해야 잘 성장합니다. 이것을 상층부(Top)와 뿌리(Root)의 비율, 즉 T/R 비율이라고 합니다. 잎 한 장짜리의 삽수묘가 한동안 새 잎을 내지 않았던 이유는 잎이 나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뿌리와 줄기의 비율이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줄기보다 뿌리의 비율이 높으면 뿌리를 쳐내야 하고, 뿌리보다 줄기의 비율이 높으면 줄기를 쳐내야 식물이 건강하게 자랍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치우침 없이 균형 있게 자라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뿌리를 내린 만큼의 비율로 균형감 있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현재를 즐기고 몰입하는 힘이 그에게는 ‘뿌리’였던 것이지요. 그의 몰입이 바로 폭풍성장의 동력이었던 셈입니다.

 

 

 -아피스토 에세이 <처음 식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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