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시 50분에 일어나 졌다. 그냥. 자연스럽게. 어제 11시 반쯤 잠들었다.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힘껏 발끝까지 기지개를 켰다. 온몸을 늘리면 늘릴수록 잠꼬리가 스스슥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몸을 뒤집어 침대 위에서 코브라 자세. 다섯 번을 아주 천천히, 마디마디를 느끼면서 목을 힘껏 젖힌다. 하체는 침대에 딱 달라붙어 있은 채. 정수리가 엉덩이에 가 닿는다는 상상으로. 허리가 너무 시원해진다. 6일 만이다. 상쾌면 통쾌변 유쾌식 트리플세트가 완성된 게. 하하. 아침에 일어나기 이틀째 비가 온다. 그런데 양은 많지 않다. 그냥 모자 하나 눌러쓰고 나가도 될 정도. 하지만 쌀쌀하다. 아직 자고 있는 남매들이 이불을 뒤집어쓰듯이 곯아떨어져 있다.
차 없는 이틀 째, 화요일. 가랑비가 내리는 듯 아닌 듯하다. 숙소에서 나와 아드님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맥카페에 들려 모닝커피를 한잔 샀다. 그리고 도로를 건너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십 분 뒤에 온다는 501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차들이 우리 앞을 지나쳐 달린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는다. 다시 십여분을 달려 헬스장에 도착했다. 내일, 목요일 볼 일을 처리해야 해서 운동을 하지 못한다는 마음이 훅하고 올라온다. 그 마음이 평소보다 삼십 분 더 기구에 매달려 있게 만들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기구 하나 끝나고 다른 기구로 옮길 때마다 알코올 티슈로 이용했던 기구를 닦는다. 정성껏 닦건, 대충 닦건 안 닦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하나 티슈로 닦아 내는 동안 옳은 일에 동참한다는 마음이 나를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걸 느낀다.
헬스장을 다녀와 따님이 준비해 준 달달 토스트를 한 개 먹었다. 오늘 저녁에 즈마야네집에 초대를 받았다. 스물둘부터 열셋까지 4남매들이 모두 치킨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치킨을 테이크 아웃해서 처형과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점심은 가볍게 먹어야 한다는 점심 담당 따님의 슬기로운(?) 조언을 나와 아드님이 동의했다. 사실은 운동하고 힘들어 먹는 것이 살짝 귀찮아진 것 같기도 하다. 점심을 먹으면서 내일부터 - 내일부터 2주 차가 시작된다 - 식사 담당 끼니를 바꾸기로 했다. 남매의 제안으로. 이번주는 아침은 아빠, 점심은 따님, 저녁은 아드님. 다음 주 일주일은 아침을 아드님, 점심을 아빠, 저녁을 따님이 하기로. 마지막 주는 따님이 아침을, 아드님이 점심을, 내가 저녁을.
그렇게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엊그제 몰에서 봤던 마네킹 이야기 - https://brunch.co.kr/@jidam/1099 - 로 흘러갔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아마 따님이 어제 수영복을 사러 쇼핑을 나갔다가 쉐이나 - 스물셋. 여성. 대학생. 한국 핏줄의 캐네디언 - 한테 이야기를 했나 보다. 그랬더니 쉐이나가 그랬단다. 여기서 4, 5년 전까지는 그런 걸 볼 수가 없었다고. 그 무렵부터 이 사회의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여러 분야에서 바꿔나가고, 제안해내고 있는 거라고. 여기서 3년째 생활하고 있는 아드님은 그런 마네킹 모습이 당연하지 싶으면서 넘어간단다. 당연히 그런 건데 싶단다. 따님과 나는 그런 모습의 아드님이 살짝 낯설긴 하다, 는데 공감한다.
마네킹 이야기가 끝날 무렵, 아드님은 최근 흑인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인어공주> 이야기를 꺼냈다. 그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해한다고. 그런데 흑인이어서, 인어공주가 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고. 라푼젤을 예로 들면서 그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는 원작의 추억이 있는데 그 추억을 흔들면서까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모습이 내키지 않는단다. 그래서 이야기의 초점은 다시 다양성으로 옮겨 갔다. 예술의 역할이 다양성이 존중되는 게 당연한 사회를 만드는 현상 그 자체라는 생각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따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그러면서 어제 산 수영복 같지 않은 수영복 - 레깅스에 펄럭이는 바지가 덪데어 있는 일체형 하의와 후드 형태의 래시가드 - 에 대한 의견 역시 비키니가 옳다, 옳지 않다는 이야기 자체가 옳지 않다는 데에 다 같이 공감한다.
그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차들이 오고 가는 광경을 무심코 보고 있었다. 그 차들 사이에 2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기다란 박스 트럭이 지나쳤다. 그러다 그 박스 벽면에 쓰여 있는 글자를 따라 보느라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SARABHA'. 무슨 회사 이름이거나 제품명이지 싶다. 그런데 난 한국인. 그냥 읽히는 데로 발음했는데, 그게 '사라바'로 읽힌다. 그러면서 혼자 풋 하고 옆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아드님을 쳐다보게 된다. 이제 한 달 뒤면 아드님은 열일곱의 나처럼 혼자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 아드님에게 숨결을 느끼면서, 밥을 같이 먹으면서 듣고 싶었던 이야기, 하고 싶었던 이야기, 함께 챙겨주고 싶었던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아 한마디로 귀결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살아봐라. 그러면서 지금 너의 생각이 조금씩 수정되어 갈 거니까. 아버지도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 인 것 같다. 나의 속도감을 내가 스스로 인지하기 시작한 게. 살아봐라. 세상 사람들의 모든 다툼의 시작점이 속도의 차이다. 각자가 자신의 인생에서 옳다고,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느끼는 속도감은 다 다르다. 그 다른 게 틀린 게 아닌데, 자기 속도감만이 옳은 게 아닌데, 그것을 강조하다 보면 강요하게 된다. 그 강요가 힘들어지면 정면 승부하거나 외면하거나 도피하게 된다. 결국, 살아보면 자기 스스로의 속도감을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인지하는 게 소중한 자산이 된다. 그리고 그 속도감을 유지하면서도 반듯하게, 번듯하게, 건강하게.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살아내는 게 잘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
나의 속도감을 타인 - 속도감에서는 가족도 타인이다 - 에게 강요하지 않는 연습이 중요하다. 그 연습만으로도 자신이 속하게 되는 공동체 - 가족이 가장 작은 공동체다. 이 공동체에서 연습된 속도감을 학교, 직장, 다양한 커뮤니티에 적용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속도감을 재측정, 수정하게 된다 - 에서 자기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역량이 뛰어나도 자신의 속도감을 강요하는 지위에 있게 되면 사적으로는 절대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충분한 연습만이 행복한 속도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우리 셋은 다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를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새하얗게 잊게 될 거라고. 어제 점심때 무엇을 먹었는지, 지난달에 무엇 때문에 말다툼을 했는지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우리 셋은 또 다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가 각자의 인생 벽돌 한 장 한 장이 된다는 것을. 그 벽돌이 단단하면서도 말캉거리는 성질을 동시에 다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이유라는 것을. 지금이 잊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에 밀려날 거라는 것을. 그게 당연한 거라는 것을. 그러나 어느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불쑥하고 지금의 내가 튀어나올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었다는 것을. 한참 시간이 지나 만나게 될 자신에게 되물어볼 거라는 것을. 써칭 센스 오브 스. 피. 드
지담
아름답게 그리워질 [지금, 여기, 언제나 오늘]에서 1일 1여행 중에 생명의 설렘을 찾아 읽고 쓰고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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