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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식물] 팽나무의 첫 그늘
아피스토23. 08. 01 · 읽음 170

중년의 한 남자가 7년 전부터 제주 일대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큰 나무가 있는 집을 찾기 위해서였지요. 그는 부인과 노년을 함께 보낼 집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원하던 집터를 발견했습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마당 한편에 자리잡은 한 아름드리 정도 두께의 팽나무였습니다. 팽나무는 수령이 족히 100년은 넘어 보였습니다. 마당에 이렇게 큰 나무가 있다니 믿기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나무가 있는 집을 찾고 있었어요. 보자마자 바로 이 집이다 싶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큰 나무에 온통 덩굴이 뒤덮여 있는 것이었어요.”

 

집터는 30년이 넘도록 관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당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덤불로 가득했지요. 팽나무 역시 덩굴식물인 송악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팽나무는 덩굴에 감겨 있던 탓에 빛을 보지 못하고 고사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고민없이 팽나무가 있는 집 터에 자리를 잡기로 했습니다. 그는 먼저 사람 키만큼 자란 덤불을 걷어냈고, 팽나무를 휘감고 있던 덩굴 줄기도 끊었습니다. 그렇게 남자는 팽나무 집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팽나무 집 담장 너머로 연못이 하나 보였습니다. 연못에는 연꽃이 그득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그는 제주에는 이런 연못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연못을 가리키며 물었지요. 

 

“집 바로 앞에 연못이 있네요?”

“이 동네 사람들은 ‘물굿’이라고 불러요. 제주는 물이 귀한 동네지요.” 

 

웅덩이에 맑은 물이 솟으면 마을 사람들은 물을 막아 연못을 만들어서 마을 식수와 소나 말의 급수장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제주가 물이 귀한 이유는 대부분의 하천이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乾川)이기 때문이고요. 건천은 하천 바닥이 암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평상시에는 하천이 말라 있다가 비가 오면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면서 하천을 따라 바다로 모두 빠져나가버립니다.

 

평소에는 하천에 물이 흐를 새가 없으니 물이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덕에 제주는 홍수가 날 일이 없습니다. 제주에는 하룻밤 사이에 육지의 1년치 강수량인 1000밀리리터의 폭우가 쏟아진 적도 있습니다. 아마 육지였다면 물난리가 날 정도의 강수량이지만, 제주에서는 빗물이 순식간에 건천을 따라 바다로 빠져나갑니다. 

 

 팽나무 집 앞에 연못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연못 근처에 팽나무가 심어진 것은 이유가 있었지요. 연못의 위치를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게 일부러 심어놓은 것입니다. 팽나무는 자연스럽게 마을의 정자나무 역할을 했습니다.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팽나무를 신성시했지요.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팽나무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직책까지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보존되어온 나이가 오래된 팽나무들이 제주에는 약 100여 그루 정도 있습니다. 그중 애월읍 상가리에는 수령이 1000년이 넘는 팽나무도 있다고 합니다.    

 

육지에서는 마을 초입에 다다르면 커다란 느티나무를 제일 먼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그 역할을 팽나무가 합니다. 실제로 제주43 사건 때 민가들이 불태워지면서 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팽나무가 그 이정표 노릇을 했다고 하죠.  

 

 “그런데 왜 느티나무가 아니고 팽나무가 심어져 있는 건가요?” 제가 물었습니다. 

“팽나무는 느티나무와 서식 환경도 비슷하고 마을의 정자나무로 역할을 하는 것도 비슷하지요. 하지만 팽나무는 ‘포구나무’라고 부를 만큼 바닷바람에 강합니다. 그래서 바닷가 근처나 섬마을에서 주로 심었어요.”

 

남자가 덩굴 줄기를 끊어낸 지 올해로 7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팽나무의 새 잎은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잎이 언제 나오나 싶었는데 올봄부터 잎이 나오더라고요.”

 

덩굴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팽나무는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더니, 마침내 잎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고사 직전이었던 팽나무가 살아난 것이지요. 팽나무의 회복을 먼저 알아본 것은 다름 아닌 새들이었습니다. 앵두처럼 붉은 팽나무 열매는 그 맛이 달콤해서 새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팽나무의 열매를 먹은 새들은 다시 씨앗을 퍼트리는 것이고요. 오랫동안 팽나무를 연구해온 식물학자 허태임 박사는 팽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팽나무는 과즙이 많은 달콤한 열매를 새와 동물들에게 제공하고 그들은 팽나무 씨앗을 퍼뜨리는 산포자가 된다. 덕분에 팽나무는 모수(어미 나무) 가까이에 모여 자라지 않는다.} 

- 허태임,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초록목록> 중에서 

 

또한 왕오색나비와 수노랑나비 등의 애벌레가 팽나무에서 먹고 자라서 나비가 되고, 비단벌레 역시 팽나무숲에 모여서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나비들이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무 한 그루가 여러 생명을 태어나게 하기 때문일까요? 팽나무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

저는 모처럼 짧은 휴가를 내고 제주에 내려왔습니다. 지인이 숙박을 알아본다기에 그러마고 신경 쓰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가 이곳 팽나무 집이었죠. 팽나무 위에는 새들이 들어앉아 지저귀고, 마당에는 나비들이 날아다닙니다. 뭍에서 온 저로서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지요. 어젯밤부터 내린 비가 그치자 앞마당에는 감귤나무와 수국, 야자나무가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어느 곳 하나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오늘도 분주히 작은 마당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꽃과 식물을 살피고 있습니다. 물론 팽나무는 자신을 살린 남자를 위해 더욱 무성한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고요.

 

 

 -아피스토 에세이 <처음 식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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