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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 무인 카페에서 생긴 일
수호SUHO22. 10. 05 · 읽음 373

 

일요일 새벽, 말똥말똥 눈이 떠졌다. 더 잘까 말까를 32초 동안 고민하다 두 다리를 번쩍 들었다. 스프링 반동으로 훅,하고 일어나야 잠이 깨는 법. 아이 종아리에 이불을 덮어주고 노트북을 챙겨 나간다. 초등학교 근처에 24시간 운영하는 무인 카페를 향해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작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게다가 이 새벽에 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무인이라고 얕보지 말라. 기계가 뽑아주는 커피도 나름 맛있다. 아메리카노 따위는 먹을 줄 모르고 무조건 '달달구리'를 지향하는 믹스커피 출신(?) 아재에게 2,800원짜리 카페모카는 그야말로 페이버릿이다.

 

 

처음엔 어리바리 자체였는데, 몇 번 와봤다고 주문하는 게 익숙해졌다. 친절하게 알려주겠다. 먼저 1번 기계에서 메뉴를 선택한다. 아이스 카페모카를 누르고 결제를 하면 2번 기계에서 컵이 나온다. 3번 기계에 컵을 올리고 버튼을 누르면 잘게 갈린 얼음이 쏟아져내린다. 다시 1번으로.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가 완성된다. 자, 이제 카페인 섭취하고 제대로 글 좀 써보자!

 

 

 

 

그런데 말입니다...

 

 

맛이 왜 이렇게 맹숭맹숭하지??? 지난번에 먹었던 카페모카는 아주 그냥 진하고 달달해서 마음에 쏙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모카 시럽이 하나도 안 들어있다. 아아, 내가 메뉴를 선택할 때 카페모카 옆에 있는 '카페라떼'를 눌렀나 보다. 이런 젠장. 가격이 같아서 헷갈렸나... 어쩔 수 없이 그냥 먹는다.

 

 

(한 시간 후)

 

 

글은 하나도 못 쓰고 라라크루(모임) 관련 일만 했다. (그만큼 즐겁다는 뜻입니다. ㅎㅎㅎ) 슬슬 카페인이 떨어져 간다. 사실 카페인보다는 당이 부족한 거다. 계획된 메뉴를 섭취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마음을 채운다. 한 잔 더 마셔, 말어? 아침 7시에 하는 고민 치고는 좀 생뚱맞지만, 그래 오늘만 날이지. 카르페 DM 아니겠나. (응?) ㅋㅋㅋㅋㅋ

 

 

다시 커피머신 앞에 섰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정확하게 '아이스 카페모카'를 누른다. 똑같은 과정을 거쳐 세컨드 커피가 완성되었다. 당 떨어진 아재가 급하게 빨대를 꽂고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마신다. 진또배기 카페모카의 맛을 상상하면서...

 

 

오, 마이, 갓스레인지...!!!!!

 

 

아까랑 같은 맛이다. 아~~ 모야모야~~ 나 제대로 주문했잖아~~ 그렇다면 기계가 잘못된 건데... 모카 시럽이 떨어진 게 분명하다. 에휴. 무인 카페에서 기계에 대고 항의할 수도 없으니... 이걸 어쩐담? 그냥 먹고 떨어져? 아니야. 돈도 돈이지만, 다른 사람도 이럴 수 있으니 사장님한테 얘기해야하지 않을까? 가게 곳곳을 살폈다. 다행히 와이파이 비번이 적인 종이 아래 연락처가 있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한데... 나도 곧 일어나야 하니 일단 문자로 보내보자.

 

 

사장님,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카페모카를 눌렀는데 그냥 라떼가 나옵니다.
혹시 해서 두 잔 해보았는데 계속 이러네요.
ㅜ.ㅜ

 

 

주무시는지 회신이 없다. 모르겠다. 내 할 일 끝냈으니 이제 집에 가야겠다. 아이가 벌써 일어나 전화하더니 아빠 오디야를 외친다. 어, 아빠 카페에서 글 쓰고 있었어. 금방 갈게!

 

 

집에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밥을 차린다. (금요일에 실컷 노는 조건으로 주말에는 친절 봉사... ㅋㅋㅋㅋ) 된장찌개와 비엔나소시지, 아이가 좋아하는 텐더 스틱을 튀긴다. 냠냠. 그러는 사이 아침의 일은 까맣게 잊었다.

 

 

10시쯤,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카페 사장님이다. 연신 죄송하다고 하는 그에게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했다. 사실 뭐 크게 불쾌하지도 않았으니까. 이따가 가게에 들러 부족한 것을 채워 놓겠단다. 그리고 모바일 쿠폰을 드릴 테니 다음에 가서 꼭 드시라고... 아니 사장님 저는 라떼도 맛있게 먹었으니 안 주셔도... 그냥 받는 게 예의겠지? 쿠폰 앞에 흔들리는 아재를 이해해 달라... ㅋㅋㅋㅋㅋㅋ

 

 

감사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1분도 안 되어 수신된 문자. 어라? 커피 쿠폰이 세 장이다. 전화를 못 받아서 죄송한 마음으로 한 장 더 보냈다는데... 사장님 저는 전화를 한 적이 없는... 그냥 받는 게 예의겠지? 오늘 커피 쿠폰 앞에 줄곧 흔들린다. ㅋㅋㅋㅋㅋㅋ

 

 

얼굴도 모르는 사장님과의 문자를 곱씹으며 생각한다. 아침 댓바람부터 좋지 않은 일이 생겨도, 거기에 온갖 분노 에너지를 들이붓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뜻대로 되지 않은 세상에 굳이 날 세울 필요는 없겠다고. 정면으로 맞서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삶에는 사실, 슬쩍 흘려버려도 괜찮은 일이 가득하니까.

 

 

오늘 받은 쿠폰 덕분에 이번 주말에도 새벽에 일어나야 할 것 같다. 글쓰기의 동력(?)을 제공해 주신 사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주말에 마실, 달달구리 아이스 카페모카를 기다리며.

 

 

 


 나 대신 전화한 사람... 생유베리감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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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SU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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