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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의 꽃이 피기까지
사농23. 09. 17 · 읽음 96

호야. 식물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어디선가 한번은 마주쳤을 식물이다. 분식집, 부동산, 편의점 한 켠에 자주 보이는 호야는 약간 두꺼운 잎에 흰 테두리가 있고 성장이 느려 큰 매력이 없었다. 어느 날 내가 운영하는 가게 앞을 지나던 여성 분이 대뜸 내게 호야를 안기기 전까진 말이다.

 

근처에서 닭발집을 하신다는 사장님은 여기가 대체 뭐하는 곳인지 너무 궁금했다며 야외 데크에서 식물에 물을 주던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나갈 때마다 내가 식물을 보고 있어 꽃집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카페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참다참다 물어보신다고 했다.

 

* 사장님이 계란껍질 화분에 삽수한 작디 작던 호야가 우리 집에 와 이렇게 자라고 있다.

 

데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가게 안으로 들어와 선 채로 1시간을 수다를 떨었다. 처음 본 사이라도 금세 공명이 되는 관계가 있는데 닭밝 사장님과도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예전엔 매장식사도 가능했던 닭밝집에서 이제 포장주문만 받는 사연을 들었다. 영업 마감을 하던 중 이미 취한 채로 들이닥친 아저씨 손님이 막무가내로 먹고 가겠다 하는 걸 거절하고 설거지를 한참 하고 있으셨다. 갑자기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욕설이 들려와 달려나가니 그 취객이 매장에서 키우던 앵무새를 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식탁을 엎고 이미 사라진 뒤였다. 7년을 함께 한 앵무새는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사장님의 마음 한 켠도 영영 닫혀져 버렸다. 사장님도 울고, 나도 울었다.

 

 때마침 가게에 손님이 들어왔고 사장님은 실례했다며 나가시는 길에 몇 마디 더 건네셨다.

 

"근데 정말 식물을 좋아하나봐요, 꽃집을 할 껄 그랬네. 나도 식물 좋아하는데 내가 또 번식을 잘 시키거든. 혹시 호야 좀 키워볼래요?"

 

그렇게 사장님은 며칠 뒤 찾아와 호야와 사랑초, 세덤과 염좌 다육이를 안기고 가셨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엔 봉지에 담은 구피 8마리를 두고 가셨고,

혹시 새를 키워볼 생각이 없냐고 해서 절대 절대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계란껍질을 이용해 소중히 삽목된 작은 친구들을 보며, 삽수용 화분을 주문했던 내 자신을 돌아봤다.

 

사장님의 다친 마음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사랑의 새싹들이 자라는게 분명했다. 그 일 말고도 장사하며 사람들한테 상처 많이 받으셨을텐데 일면식도 없던 타인에게 이렇게 또 무언가를 나누실 수 있다니. 저런 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호야를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복잡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호야'는 옥잠매라고도 불리는 호야속 박주가리과 식물이다. 동남아시아와 호주북부에 산재해 있고 열대성 여러해살이풀이다. 다육질의 잎은 광택이 살짝 있고 서식환경이 맞으면 꽃도 피운다. 하지만 분식집이나 부동산, 편의점에 있는 호야가 꽃을 피운 건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이왕 주신 거 잘 키워 봐야지 생각이 들어 웹에서 검색을 해보다가 호야의 세계가 엄청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수천만원에 호가하는 희귀 호야부터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호야까지 그 종의 다양성과 스펙트럼에 날을 샐 뻔 했다.

 

 

*희귀까지는 아니지만 지갑사정을 고려했을 때 내겐 최고 희귀한 호야 쪼꼬미들 식쇼핑의 현장

 

 

잎의 모양과 무늬, 꽃의 색, 향 등 하나도 비슷한 호야가 없었다. 서로 다른 매력의 수백가지의 호야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장바구니엔 10만원 어치의 호야가 담겨버렸다. 수동태다. 내가 담은 것이 아니다. 정말 담겨버렸다.

 

 

 

*배송된 많은 호야 중 하나인 호야 랑산, Hoya Rangsan. 잎의 무늬가 독특하다.

 

 

식집사의 생활이 몇년 차에 접어들다 보니 식물이 배송되면 먼저 가지고 온 흙을 모두 털어 검사를 한다. 응애나 깎지벌레, 총채벌레 등 퇴치하기 고약한 친구들을 달고 오는 경우가 꽤 많다. 하지만 호야는 착생식물이라 바크에 뿌리를 돌돌 감고 있어 분해가 무척 어려워 며칠 일단 두고 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발견된 솜깎지벌레.

 

식집사의 벌레에 대한 반응 부류는 대략 이렇다.

1. 으악 벌레라니! 통째로 버린다.

2. 널 살려보겠어! 분갈이와 물샤워를 한다.

3. 벌레 내가 박멸한다! 온갖 정보를 수집해 독한 약들을 친다.

4. 아 또 생겼네 잡지 뭐. 보일 때마다 무심히 잡는다.

 

모든 단계를 거친 나는 복합 모드를 주로 이용하는데 솜깎지벌레가 보일 때마다 이쑤시개로 잡으며 호야의 상태를 살폈다. 과산화수소수를 희석해 면봉에 뭍혀 소독도 하고 물샤워도 해주며 극진히 보살피던 어느 날!

 

 

*원래 더 풍성해야 하는 꽃망울들은 솜깎지벌레와 나 사이의 전쟁에서 처참한 슬픔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달랑 잎을 두장 달고 솜깎지벌레의 총공격을 받던 작은 호야 랑산은 꽃대에 꽃망울을 물기 시작했다.

별사탕! 어릴 적 건빵봉지에 들었던 별사탕 생각이 났다. 너무 작아 건드릴 수도 없는 그 꽃대마저 솜깎지가 번졌지만 포기란 없다. 나는 너를 살려보겠다. 너가 꽃을 피우는 것을 최선을 다해 돕겠다 외쳤다.

 

 

 

 

 

 

 

 

 

 

 

그렇게 피어난, 새끼손톱의 반도 안되는 작은 한송의 호야 꽃.

닭발 사장님이 겪은 척박하고 슬픈 일들. 그 메마른 일들 위에 다시 또 사랑을 심는 사장님의 마음을 쏙 닮은

귀하고 대견한 호야 랑산의 꽃 한 송이에 오늘을 또 살아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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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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