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정신못차리고 우드득우드득 얼음을 부셔먹던 나.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다가와 이런말을 건넸다.
남편 - "당신 빙식증 아니야?"
나 - "뭐?"
처음엔 남편이 나에게 욕을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눈을 치켜뜨고 남편을 보며 말했다.
나 - "욕한거야 지금?"
남편 - "ㅡㅡ 빙.식.증."
친절한 남편은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말해주었고 그제서야 제대로 알아들은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았다.
빙식증: 얼음을 씹어먹는 일종의 습관, 철분부족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음
아, 이런게 있구나. 하고 넘기려는데 남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남편 - "여기 나와있는거 보면 당신 빙식증이 확실해. 계절상관없이 얼음 먹고, 습관적으로 먹고, 시도때도 없이 먹고. 이유가 철분부족이래. 당신 철분부족 맞잖아. 만성빈혈"
나- "그래서?"
남편 - "게다가 우유랑 커피를 그렇게 많이 마시니 자연스럽게 들어오던 철분도 흡수가 안되잖아."
나- "그래서 우유를 끊어? 그러면 금단증상으로 엄청 예민해질텐데?"
남편 - (말이 없다. 평소 내가 짜증내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남편은 예민해진다는 말에 흠친한듯했다.)
그렇게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내가 빙식증인걸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 나는 우유를 포기할 수 없었고(언제 나의 우유사랑에 대해서도 말해보려한다. 30년 가까이 우유를 물처럼 마신 스토리를.) 커피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빙식증이면 뭐 어때, 한번사는 인생, 먹고싶은거 먹고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또 철없게(이제 나이가 많아서 철없다고도 할수가 없지만 딱히 대체할 표현이 없다.) 그냥 넘겨버렸다.
결국엔 응급실
그렇게 또 몇달이 지난 어느날 저녁을 차리다 몸이 이상했다. 꽤 최근의 일이다. 식은땀이 나고 온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어 열을 재보니 38.9도. 뭐지? 코로나인가? 싶어서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서 독감, 코로나 검사, 소변검사, 혈액검사 등등 온갖검사를 해봤지만 결국 이유는 찾지 못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사는 나에게 이런말을 했다.
"일단 염증수치도 정상이고, 코로나 독감도 음성이고, 딱히 몸에 문제가 있는것같지는 않은데
철분수치가 낮네요."
순간 내 귀에는 "철분수치가 낮네요"라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치 반복재생을 설정해놓은것처럼..철분수치가 낮네요 철분수치가 낮네요 철분수치가 낮네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 "철분제 챙겨드세요."
집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더이상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전히 이팔청춘도 아니고 이제 곧 불혹이 가까워지는데 먹고싶은거 먹고 살겠다고 내 몸을 이렇게 방치했다가는 이유도 모른채 병원에 가야만하는 일이 계속 생길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그 날 철분제를 바로 구입했다.
쑥과 마늘 프로젝트(FEAT. 라라크루)
그리고 그 쯤 내가 속한 글쓰기 모임 라라크루에서 쑥과 마늘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저번에도 한번 소개한적이 있었지만 첫 쑥과마늘 프로젝트에서는 영어공부를 엄청 많이 했었고, 그 이후로는 식물도 키우고 내 애들도 키우고 나도 키우느라 참석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분제를 먹기로 결심한김에 아예 공언을 해버려서 지키지 못하면 안되게끔 만들자는 마음으로 쑥과마늘프로젝트에 급 참가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철분제를 계속 먹고 있다. 비록 최근 2주동안은 아이들 병수발드느라 제대로 못먹었지만. 그런데 철분제 효과였을까. 두 아이들이 연달아 독감에 걸려서 나한테 더더더더더 붙어있는 바람에 잠도 같이 자고 밥도 같이 먹고 그랬는데 나는 살짝 삭신이 쑤시긴 했지만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
남편이 "너네 엄마 대단하다."라며 감탄했다. 그리고 철분제만 먹었다 하면 나를 고생시킨 "변비"도 싹 사라졌다. 나는 철분제를 먹어서 변비가 생긴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얼음을 계속 먹어 몸이 늘상 찬 상태였기 때문에 되려 장활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 철분제를 챙긴지 일주일 쯤 지나서부터는 진짜 전혀 얼음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말 신기할 정도이다. 누가 얼음커피를 주면 마시기는 하지만 얼음 깨먹을 생각을 하면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그 전에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얼음을 남기면 내가 다 가져와서 먹기 바빴는데. 참..이렇게 쉬운걸 20년을 넘게 고집하고 있었다니, 과거의 나..참 미련했다.
맘모꾸리
맘모꾸리는 1만년전에 땅에서 얼어붙은 모습 그대로 발견되어 주변을 놀래켰다고 한다. 어쩌면 나 역시 맘모꾸리처럼 계속 얼어붙어있었던건 아닐까. 그리고 생각해보면 내 주변 사람들도 사상 최고 영하 기온을 찍은 날에도 얼음을 씹고 있는 나를 보며 놀라는 반응을 보였었고.
비록 맘모꾸리는 빙하가 점점 사라지면서 그 개체수가 적어졌다고 알려져있기 때문에 얼음과 이별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나는 얼어붙으면 얼어붙을수록 내 존재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제는 이별하려한다.
"얼음아, 남편이랑 함께한 세월보다 너와의 세월이 훨씬 더 길지만, 이제 보내줄게. 잘가. 다시는 우리 만나지 말자."
그리고 비록 쑥과마늘프로젝트 5기가 끝나고 6기가 시작된 시점이지만, 올해 건강검진을 받고 결과가 나오면 뒤늦게라도 철분수치를 찍어서 인증하려한다. 챙겨먹은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겠지만 쑥과마늘프로젝트에 참가한 분들이 다 정말 따뜻하게 으쌰으쌰해주시는 분들이라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다같이 축하해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본다.
파초청녀
커피를 사랑하고, 환경지키는것에 관심이 많으며,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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