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길가의 나무들을 ‘그냥 늘 거기 있는 것’, 그러니까 하늘처럼 산처럼 강처럼 그저 풍경으로 여겼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고 눈이 오면 살포시 얹고. 늘 그 자리에서 봄의 신호로 새순을 내밀고 번성했던 잎을 물들였다 떨구기를 묵묵히 반복하는 풍경.
식물을 키우게 되면서 겨울 어느 날, 바깥의 식물들이 너무 놀랍기 시작했다. 두둑히 입고 두둑히 입혀 나온 개들과 훌훌 나오는 입김을 손끝에 호호 불어가며 산책을 하면서, 화단의 나무들이 아무것도 안 입고 아무 데도 안 가고 서서 이 추위를 내내 견디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집 안의 식물들이 생각났다. 겨울의 느려진 물때를 맞추고 건조를 신경쓰고 광량을 살피고 냉해를 입지 않으면서도 벌레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환기를 시키면서 돌보는 식물들이 떠오르자, 겨울 바깥을 가만히 견딜 수 있게 된 식물들이 늘 겪어왔을 어떤 치열함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다 작년에 호프 자런의 <랩 걸lap girl>을 읽으면서 내 감탄이 실제 식물들이 하는 일에 비하면 너무 단순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빈약한 상상력에 기반한 납작한 감탄이 경외심으로 바뀌는 쾌감.
식물의 세포 하나하나 자체가 물을 담는 상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추워지면 세포가 모조리 얼고, 언 물은 팽창되므로 얼어 터지는 게 당연할텐데.
그런데 이 똑똑한 식물들이 말이다. 아.. (생각할 때마다 사랑에 빠져버림) 추위가 다가오기 시작하면 세포벽의 투과율을 높여 영양분 같은 화학물질들은 세포 안에 농축된 시럽 형태의 부동액으로 남기고 물은 세포 밖으로 흘려보내 세포 사이사이를 채우는데, 이 물이 고도로 정제된 순수한 물이라 얼음 결정의 핵이 될 원자조차 없어서 얼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천재…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는다. (…) 대신 그들은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 (…)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의 살아 있는 것에게 꼼짝 않고 한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영하의 날씨 속에서 3개월을 견디라고 하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많은 종의 나무가 이런 일을 몇 억 년 이상 해내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p274
나무들이 겨울이 오는 것을 아는 방법은 ‘일광의 길이’라고 한다. 날씨는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태양은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p276
크… 어떻게 안 사랑해.
북글엄
북 치고 글 쓰는 엄마, 북글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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