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일정을 마치고 비도 피할 겸 쉬면서 점심 먹으려고 요기 거리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
"없다"
남편 얼굴이 흙이다
핸드폰이 없단다.
그랩에 두고 내린 건가.
그가 뛴다.
아, 저 남자 20여 년 전 과대표로 체육대회 계주하던 사람이지.
잊고 있던 날렵함을 싱가포르에서 볼 줄이야.
다행히 바로 승객이 이어졌는지 우리가 타고 온 그랩은 여전히 호텔 로비에 대기 중이었다.
다행이다.
금방 찾겠다 싶었다.
근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이제부터 제발 비웃지 말아 주시길.
정규 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했으나 하고싶은 말을 영어로 옮기는 것이 전혀 안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던 길동이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생각은 있으나 영어로 말하지 못하니 꿀 먹은 길동이 상황.
그랩을 보고 안도했던 마음은 금세 막막함으로 답답하다.
하지만 고민할 시간이 없다.
막가파 콩글리시를 날렸다.
급하니깐 나온다.
"I lost phone. Have you seen phone?"
문법을 파괴했건, 콩글리쉬건 상관없다.
그 와중에 필요한 말을 입 밖으로 말해낸 것이 기특해서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은 본인이 앉았던 앞 좌석을 나는 아이들과 같이 있던 뒷좌석을 확인했다.
그런데, 없다.
아구야.
곧바로 다음 예약 손님이 와서 더 뒤적일 수 없어서 물러나야 했다.
뭐라 상황을 설명하고 더 찾아보고 싶지만 말이 짧으니 그것이 불가한 상황.
이때부터 진짜 당황하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그랩에 없다면 어디 있는가.
기억을 더듬어보자.
기억 1. 남편이 그랩을 부르기 위해 손에 쥐고 있었다.
기억 2. 그랩이 어떤 앱인지 궁금한 아들이 폰을 가져갔다.
기억 3. 더위에 지친 딸아이와 아들이 같이 앱을 구경하며 놀았다.
기억 4. 그랩이 도착해서 타고 왔고 호텔 로비에서 핸드폰 없음을 인지했다.
어디를 놓친 걸까.
아이는 그랩 타기 전에 핸드폰을 아빠에게 줬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기 탓일까 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아이들은 진정시키고 그랩을 탔던 아랍 거리도 다시 가봤다.
우리가 5분간 서서 그랩을 기다렸던 식당에 가서 직원에게 물었다.
"I lost phone. Have you seen my phone?"
신용카드도 아닌 같은 말 돌려막기
진정 이게 최선이니?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니
이 몹쓸 영어 실력 어쩌지
영알못의 자괴감으로 괴롭지만 지금은 문제 해결이 먼저다.
식당에서도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점점 불안해진다.
다행히 여행 중 사용할 카드, 현금 등은 모두 내가 갖고 있다.
하지만 현지에서 수수료 없이 사용하는 카드인 트래블월렛은 남편 폰 앱이 있어야 충전이 가능했다.
게다가 남의 나라에게 폰을 분실해서 나쁜데 쓰일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 되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편은 뭐든 정보찾기에 빠르고 앱과 같은 툴을 잘 다룬다.
내 폰으로 검색을 쓱쓱 하더니 분실폰 위치 추적을 시작했다.

위치 추적을 해보니 폰이 이동 중이었다.
누가 주워갔나?
하지만 사람의 이동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였다.
폰은 빠르게 이동해 이미 마리나 베이 샌즈에 가 있었다.
우리 다음 그랩을 탄 가족이 짐을 잔뜩 챙겨 탑승했으니 공항 또는 다음 숙소 이동이었을 거다.
다시 그랩이 의심되는 순간이다.
앱으로 벨소리 울리기 기능과 카카오톡의 보이스톡을 번갈아 계속 시도했다.
그 사이 미리 도움을 요청할 대상을 생각해봤다.
한국인 직원이 상주하는 호텔에 묵고 있으니 그분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뭐라고 말해야 그분을 만날 수 있나.
또 영어가 발목을 잡는다.
직원은 어떤 단어를 써야하나.
(잊지말자. 비웃지 말기로 했음을)
이런 기초영어단어도 생각이 안나니 미칠 노릇.
한참 지나서 step이라는 단어를 쓰면 뜻은 통하겠다 싶었다.
호텔에 가면 Please, call a korean step이라고 해야겠다 연습하고 있던 순간.
드디어 누군가 보이스톡을 받았다.
역시 그랩이었다.
말하기는 보잘것 없으나 그나마 리스닝은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호텔로 가져갈 테니 미리 나와서 기다리라는 말에 급하게 다시 호텔로 이동했다.
맞춤 맞게 도착해서 쿨하게 핸드폰만 주고 가려는 그에게 사례금을 전달하고 보내드렸다.
참았던 안도의 숨을 뱉었다.
폰은 앞좌석 틈사이에 꽂혀 있었단다.
그런데 묻고싶었다.
분명 폰은 벨소리로 설정되어 있고 보이스톡과 강제 벨울림을 20분 가까이 번갈아 울렸을 거다.
우리 다음 손님이 마리나 베이 샌즈까지 가는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시간의 공백이 있는데 왜 받아 주지 않았을까,
애타게 핸드폰을 찾고 있는 걸 알면서.
물론 그만의 사정이 있겠으나 궁금해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길다.
하릴없이 thank you 만 반복하며 손을 흔들 수 밖에.
핸드폰 분실은 소동으로 마무리 되었다.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나 돌아가면 진짜 영어공부할 거야. 해야겠어, "
그랬더니 남편이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너, 홍콩 갔다 오면서도 똑같이 말했어. "
10년 전에도 그랬다니.
풉, 나란 여자 참 한결같구나
그럼 이번에도 말뿐이겠네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시켜 주니 어찌나 고마운지.
그렇다면 나는 글렀으니 남매 영어공부에 매진해야겠다.
영알못이 해외에서 폰을 잃어버리고 애꿎은 애들이 욕보게 생겼다.
코케허니
밋밋한 삶에 글무늬를 입혀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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