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방 텃밭 이야기
이다24. 03. 18 · 읽음 271

그로로팟에 당첨되어 바질을 키웠다. 오랜 식집사 생활이 무색할 만큼 작은 씨앗이 발아하고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눈앞에서 한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매일의 나를 깨우는 일이기도 했다. 

 

미션이 끝났지만 바질은 지금까지도 꼿꼿하게 잘 살아있다. 먹어 말아? 왠지 시들해진 것도 같고 이쯤에서 그만해야 되나도 싶다. 실은 얼마 전에 바질 화분 하나를 비워 파스타를 해 먹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들어 나머지 하나는 남겨두었다. 다른 사람들의 바질을 보며 왜 내 바질은 안 크는 걸까 생각했는데 이젠 키도 제법 자라 휘청거린다. 

 

아직까지도 이러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 같다. 지난번 금어초 그로로팟 시즌에 떨어지고 나니 바질이 옆에 있는데도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뭐라도 키우고 싶은데 뭘 키울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굳이 씨앗이나 흙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채로 다른 이들의 미션을 보며 겨울을 지냈다. 

 

어느 날 sns에서 장 봐온 채소들의 밑둥지를 물꽂이로 키우는 걸 봤다. 순간 저거다 싶었다. 흙이나 씨앗을 사지 않아도, 텃밭을 일구지 않아도 뭔가를 키울 수 있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샐러드를 좋아해 매번 장바구니엔 샐러드용 채소거리들이 넘쳐난다. 그걸 이용해 나만의 작은 미션을 시작할 수 있다니. 

 

정신을 차리고 물꽂이용 화분을 하나 마련했다. 장을 보고, 평상시라면 무심히 썰어 버렸을 로메인 밑동을 조금 길게 남겨 물에 담갔다. 정말 자라는 걸까. 자리는 어디가 좋을까. 매일 관찰해야 하니 주방 싱크 앞의 선반이 제격이다 싶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났다. 겉 부분은 미끌거리며 갈색으로 변한 부분도 있었지만 가운데에선 작은 새싹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도 놀라운 속도로 삐죽삐죽 솟아난다. 바질에게 가 있던 신경이 어느새 작은 물꽂이 텃밭으로 이동한다. 허전한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그것들을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매일의 설거지 시간이 즐거워질 지경이다.

 

 

장을 봐올 때마다 로메인 밑동을 하나씩 더 넣어주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대파를 한 단 사와 대파 수염을 물에 씻어 비어있던 곳에 꽂아 주었다. 정말 물속에서 파가 자라는 건지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바질을 뽑아낸 흙에는 물꽂이와 비교하기 위해 대파뿌리 3개를 따로 심었다. 누가 더 잘 자라는 걸까. 

 

아침에 눈을 떠 주방에 가면 채소들이 나를 반긴다. 오늘은 이만큼 컸다며 휘청거린다. 자리를 다시 잡아주고 쓰러지지 않도록 매만져 주기도 한다. 로메인 잎사귀는 어느새 수북해졌고 파가 자라는 속도는 놀라울 뿐이다. 어디서부터 뜯어내야 하는 걸까. 

 

 

그러나 바질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한 잎도 먹지 못했다. 과연 먹을 수 있는 걸까도 싶다. 버려버리면 음식물쓰레기뿐일 텐데 물에 꽂으니 살아있다고 외치는 새싹들을 어찌 먹을 수 있을까도 싶다. 식물등이 없어도 흙이 없어도 영양분이 없어도 채소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나가고 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날 살포시 한 잎 두 잎 따먹을 생각이지만 허전했던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준 나의 주방텃밭 채소들.

 

미션이 없어도 괜찮다. 나는 어느새 식물과 소통하는 진정한 식집사로 자라나는 거 같으니까. 그러고 보니 새로운 그로로팟 시즌이 시작되려 한다. 이번엔 당첨이 될까. 



8
이다
팔로워

10년째 화분에 물주는 여자. 샐러드를 좋아해요^^

댓글 8

첫 번째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전체 스토리

    이런 글은 어떠세요? 👀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