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손이 가는 대로 막 그렸다. 선을 치지직 겹쳐서 긋고 이상하게 그은 선은 고치기 싫어서 그냥 색칠했는데 또 하다 보니까 몇 군데 지우고 싶어져서 지우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조금만 내키는 만큼만 고치고 마음 가는 데까지만 색칠했다. 하기 싫은 건 하지 않고 방금까지 하기 싫어서 안 했지만 다시 하고 싶어진 건 결정을 번복하고 그냥 했다. 

이건 정말 기분이 좋다. 이런 식이라면 그림을 몇 개 더 그릴 수도 있겠다. 나는 그림의 분위기와 감각적인 느낌만 냈다. 

아직 적지 않은 소설의 다음 화도 어떤 식으로 전개할지 생각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생각이 안 났던 것은 아마 겁먹었던 모양이다. 전개가 마음에 안 들면 수정하겠다고 미리 적어뒀는데도 그랬나 보다. 

그림도 글도 어느 순간부터 그럴듯하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사로잡혔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실망도 있겠지만 내가 거기에 실망할까 봐 너무너무 무서웠었지. 이런 마음들은 내가 쌓아온 업보와 오랜 습관처럼 몇 번이고 걷어내야 할지도 몰랐다. 몇 번이고 걷어내며 말할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모두가 실망해도 계속할 수도 있는 거였다고. 여태까지처럼 언젠가 잘할 거기 때문에 실망해도 된다는 대가성 있는 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냥 계속 못해도 실망해도 괜찮다고. 

잘하면 또 잘하는 거고 그런데 그거와 별개로 좀 못나 보이고 못했어도 괜찮았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그 관점에서 해봤을 때 과정이 정말 즐거운 걸 찾아보면 좋겠다. 그게 과정을 즐기는 방법이 될 테지. 그런 게 있더라. 정말로 잘 하고 싶으면 너무 잘 하고 싶다는 것에 연연하면 안 된다는 말. 잘 하고 싶다면 많이 해봐야 하고 많이 하면서 지치지 않으려면 즐겨야 해. 하는 과정이 하나도 즐겁지 않으면 꾸준히 지속하기 어렵다고 해.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집착한다면 잘하지 못하는 건 아무것도 즐길 수 없을 거야. 그래서 과정이 하나도 즐겁지 않은 거고. 그래서 앞으로도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그렇지만 잘 못해서 서툴러도 이건 그냥 하는 게 즐겁다 하는 걸 꼭 찾길 바라. 일단 게임이 그렇지?

못해도 잘할 때까지 계속해도 재밌었던 거. 그 판을 못 깨도 계속하고 싶은 거야, 밤을 새울 정도로. 못해서 가치가 없다거나 쓸모가 없다는 생각은 하나도 안 나고 그냥 그게 재밌었다 바로 또 해야지. 내일도 해야지, 하는 생각만 들었던 거 기억할까? 과정 자체가 재밌으니까 이겨도 다음에 하면 또 질 수도 있는데 이긴 채로 그만둔다는 생각은 안 하고 계속했고 지고 이기고를 반복했어. 그 과정이 하나도 안 피곤했던 거. 그게 결국은 내가 잘하게 되는 무언가니까. 꼭 게임이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감각이 들었던 걸 탐색해 보자. 조금 더 과거를 뒤져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이해득실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었을 그 지점에 좋아했던 것들은 이유가 순수했으리라 보거든. 그 느낌과 감각을 그대로 가져와서 현재 잘해야 한다는 감정을 쳐내도 하는 거 자체에 만족스러운 걸 찾아봐야 해. 그 정도가 미약해도 괜찮아. 

아마 순수한 마음으로 원 없이 해본 건 그리 많지 않을 거거든. 하나 찾아내면 연관된 게 여러 개 딸려 나올 수도 있을 텐데. 그것들도 같이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나 질리면 돌려 막기가 가능해지고 질리기 전에 이것저것 해보며 순환하는 게 좋아 보여. 언젠가는 지금의 생각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 밟아야 할 단계의 생각들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의 내 시야에서 보이고 알 수 있는 이걸 해나가야 다음 단계가 들어올 거야. 그러니 이걸로 그대로 진행해 보자. 충분히 생각했는데도 이거보다 더 잘하고 싶다는 건 욕심이지. 지금 내가 못 보는 게 있다면 아직 그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