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글을 처음 쓰게 된 목적이나 계기와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글을 통해 받은 위로가 너무 컸다. 내가 글을 통해 위로 받은만큼 나의 글도 누군가에게 작은 따뜻함을 전했으면 하는 바램에 글을 써왔다.
이번 글은 더욱이 힘든 순간을 버텨내고 있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었다. 각자 위치에서 느끼는 힘듦이 다르기에 그 무게를 감히 예측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아주 작고 별거 아닌 이야기도 듣는 사람에 따라 큰 위로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보려 한다. 나와 다른 상황들릴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한 줌의 따뜻함으로 전해지길 바라며 짧은 오피니언을 시작해보겠다.
작년 심리학 수업이었다.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인간의 기억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인간의 기억과 관련하여 인지심리학의 한 부분인 망각과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을 알아보았었다. 망각이란, 기억의 반대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개인의 장기 기억 속에 이미 저장되었던 정보를 잃어버리는 현상으로 지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뚜렷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기억 수행을 위한 세 단계인 정보의 부호화, 저장, 인출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쇠잔 이론(decay theory)에 따르면, 기억은 중추 신경계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 기억 흔적을 남기는데, 이 기억 흔적은 사용되지 않으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신진대사 과정에 의해 점차 희미해지고 결국에는 사라진다고 한다. 망각은 뇌의 어쩔 수 없는 작용이며 결국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다.
망각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망각의 동물이 영원히 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리들의 경험 중 특정한 것들은 망각하기 힘들다. 자연스럽게 희미해지다 잃어버리는 것도, 나의 의지로도 떠올리지 않으려 하는 것도 힘든 것들이 있다. 기억을 잃어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작은 선물 같은 것이 바로 기억의 미화이다. 미화는 기억의 특정 부분이 사라지거나 왜곡되어 아름답게 포장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미화된다. 과거의 경험과 그 순간 느꼈던 세세한 감정까지도 기억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힘든 순간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단순히 ‘힘들다’라고 표현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우리에게 남는 것은 ‘힘들었다’라는 네 글자와 ‘그때 그랬었지’하는 추억 회상 정도일 것이다. 수험생 생활을 무사히 마친 대학 합격생들, 취준생들은 합격의 순간 그 기쁨을 누리며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로 기억을 미화할 것이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들도 끝남의 후련함을 느끼며 고생했다는 말로 기억을 미화할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겪은 고통과 인내의 기억, 처절한 노력만이 가득했던 경험, 끊임없이 포기와 견딤 사이를 오간 그 모든 것들이 어느새 미화되어간다.
왜곡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과는 모순적이게 미화는 삶을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라 볼 수 있다. 기억의 특정 부분이 왜곡되고 희미해져 가는데 그 왜곡과 희미함으로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미화는 과거의 결핍을 지우고 그 빈자리에 결실만을 남겨준다. 힘든 순간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 인내의 과정에서 깨달은 삶의 이치 등을 남긴다. 그렇게 괴로움과 고통, 힘들었던 과거는 조금씩 옅어진다. 그래서 기억이 미화되는 것은 과거 힘들었던 순간에 멈춰 내가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 생각한다.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 순간에도 소중한 나를 지켜내기 위해 기억이 미화되며 괜찮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힘들었던 그때의 모든 것이 미화되는 것은 때론 아쉬움을 남기기도 허무함을 남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뿌옇게 변해버린 덕에 과거에 두 발이 묶인 채 제자리걸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힘들었던 것을 알면서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이런 뫼비우스의 띠 같은 우리의 인생을 위해 존재하는 미화가 퍽 고마울지도 모른다. 방어기제의 일종인 미화의 존재를 알면서도 함께하는 우리의 인생은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의 기억이 미화(美化)가 되었다. 비로소 우리의 인생은 미화(美花)가 되었다.
원상연
무겁고 쓸쓸하고 담백하면서, 그 어두움마저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써내려갑니다. 홀로 찾아와 뜨겁게 위로받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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